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피스트 (문단 편집) == 이야깃거리 == 사실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정확히 평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위 철학자로 불려지는 사람들의 저서는 비교적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았기에 널리 베껴지고 길이 남겨질 수 있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저서는 현대로 따지자면 자기계발서나 문제집, 교과서, 강의록 등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리 널리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는 소피스트들을 재평가하고 추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대인들조차 그들의 수사학과 같은 실용적인 부분을 연구했지 그들의 사상은 별 관심이 없어했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사상을 담은 저서는 남아있지 않다. 이들의 사상은 대부분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이 인용한 구절을 통해서만 유추할 수 있는데 어떠한 상황에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명확한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큰 업적 중 하나는 그리스 학자들을 총망라하며 그들의 사상을 설명하며 평가했다는 것에도 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의 철학적 업적일뿐 아니라 후세에 그리스 학자들의 철학을 전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원전을 전하기보다는 자기 식으로 이해하거나 멋대로 까내리면서 자기 철학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용하기도 했으므로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어려움으로 남았다.] 헌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들을 사이비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의 의견이나 학설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을 남기지 않았다. 직접 쓴 저서가 남아서 전해지는 고르기아스는 운이 좋은 사례. [[제자백가]]들 중에서 소피스트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명가(제자백가)|명가]]이다. 대표적인 사상가는 혜시 (惠施)와 공손룡 (公孫龍)을 뽑는다. 혜시도 본인이 남겼던 저서는 모두 소실되고, [[장자]]에 기록된 역물십사 (歷物十事) 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역물십사에서 혜시는 인식의 상대성을 주장하고, 공손룡은 백마비마(白馬非馬)론 등을 통해 인식의 상대성과 한계를 주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과 소피스트들의 공통점은 크게 다섯 가지로, 직접적인 저술이 안 남아 있어서 이들을 비판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당대에 궤변론자로 통했다는 점, 정치활동에 주력하였다는 점, 언어의 활용에 주목하였다는 점, 언어를 정교하게 따지고 들어 재판에서 맹활약을 하며 그로 인해 돈벌이를 했다는 점이다.[* 명가가 동양의 논리학을 창시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명가가 논리학을 창시했다고 하면 플라톤도 논리학을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기 아테네의 몰락 이후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소피스트들은 몰락했지만 이후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합병하고 그리스의 지식인들을 대우하기 시작하면서 2세기에 그리스 수사학과 철학이 또다시 번성하게 된다. 이를 2세기의 그리스 학자인 필로스트라토스의 표현을 따라 제2차 소피스트 운동(Second Sophistic)이라고 칭한다. 이들은 과거의 소피스트들처럼 수사학을 활용하여 정치적은 성공을 노렸으며, 로마 제국의 행정과 외교를 담당하면서 로마 제국 내의 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았다. 이들 또한 학문(특히 수사학)의 달인이라는 의미로 소피스트라고 불렸으나, 로마 제국이 쇠락함에 따라 소피스트들의 부흥기도 끝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