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하 (문단 편집) == 평가 == '''[[관이오]], [[제갈량]] 등과 함께 중국사 [[명재상]]의 대명사.''' 《사기》<소상국세가>에서는 소하가 죽고난 후에도 황실이 소하의 후손을 찾아 작위를 잇게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 위에 나온 일화들을 정리해보자. 그의 마스터플랜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유방을 조직의 수장으로 추대하고, 한신의 출중함을 알아보고 그를 대장군으로 추천하는 등 '''주요 인사관리는 모두 소하의 공적이다.''' 함양을 점령했을 때 승리에 도취된 유방의 무리들과 달리 '''오직 소하만이 지리와 인적 사항 등 정보를 수집했다.''' 파촉으로 몰려, 진의 장수들과 항우의 군대가 유방의 세력을 끝장낼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모두가 결사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부르짖을 때도 역시 '''오직 소하만이 흥분한 조직을 평정하여 위기를 극복해냈다.''' 관중에 대기근이 들어 아무런 일이 없어도 나라가 휘청거릴 상황에서 항우라는 막강한 적까지 엄습하고 있음에도 소하는 언제나 병력을 채우고 병장기와 식량, 마초를 보급해냄과 동시에 한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냈으며, 이렇게 매번 깨지면서도 재기하고 싸우는 유방의 군세에 결국 항우는 무너진다. 항우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신이었지만, 결국 항우를 이긴 것은 소하인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통일 이후 법령을 세우고 행정을 완비하는 등 '''국가 실무 기반 또한 소하의 공적이다.''' 공신이 국가에 미치던 해악이 모든 역사에서 입증되었듯이, 한신의 죽음에 소하가 관여되었다는 것 또한 소하의 선견지명이라 볼 수 있다. [* 말하자면 장량이 나라 자체를 건국할 큰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한다면, 소하는 유방의 세력과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지금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청사진을 그려주는 사람이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다만, 그런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초한지]] 같은 소설에서 소하의 활약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실제 사기나 한서 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도 소하는 한신같이 군대를 이끌고 추풍낙엽으로 적을 무찌르거나, [[장량(전한)|장량]]처럼 계책을 내 전략을 수립하지도 않아 기록도 이들보다 분량이 적다. 심지어 사기에서 조참보다도 기록의 분량이 적었다가 한서에서 파촉으로 쫓겨난 유방이 항우와 일전을 치르려는 걸 말리는 대목을 추가해 조참의 기록과 겨우 분량이 비슷해졌을 정도다. 그러나 소하는 그런 영웅들의 화려한 전설 뒷편에서, 그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묵묵히 마련해 주었다. 삼진을 평정한 한신의 공에는 파와 촉에서 물자를 끌어올린 소하의 공훈이 있었다.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유례없는 대패를 당했으나 소하의 보급에 힘입어 이를 극복했다. 유방과 항우 최후의 [[광무 대치|광무(廣武) 대치]] 당시에 이르러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항우 측이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자고 반쯤 애원하는 것을 유방이 코웃음치며 비웃을 정도였다. 항우는 그 이전까지 유방을 수차례 격파했지만, 소하의 보급이 이어지면서 결코 유방에게 결정타를 먹이지 못했다. 천하가 통일된 후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소하는 관중을 지키며 그 기반을 든든하게 했다. 또한 한신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했고,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경거망동도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다른 공신들이 주살되는 와중에서 몇 번을 의심받으면서도 천수를 누렸다. 오히려 의심을 받을 때마다 지인들의 진심어린 조언을 받아들여 의심을 푸는 사례를 통해, 그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현명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선구안과 인망까지 보여주었다. 서한삼걸 중 소하는 가장 튀지 않는 일생을 살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일생은 영광된 일생이었다. [[사마천]]은 소하에 대해 이렇게 평론을 남겼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여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한신(韓信), 경포(黥布) 등 한나라 창업공신의 대부분은 주살되었으나, 소하가 이룩한 공적만은 찬란히 빛나 그의 지위는 공신 중에서 제일 높았으며, 그 명성은 후세에까지 전해져 주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킨 굉요(宏夭)와 산의생(散宜生)[* [[주문왕]]의 신하로 문왕을 보좌했던 사람들이다. 이 둘과 태전(泰顚), 남궁괄(南宮括)을 더해 '문왕사우(文王四友)'라고 불렸다. 이 중 남궁괄은 [[봉신연의]]에도 등장하는 그 사람 맞는다.] 등이 이룩한 공적과 비견될 만하다고 하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