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하 (문단 편집) ==== 전쟁의 기반 ==== 한신을 얻은 유방이 이윽고 동쪽으로 나가 [[삼진(초한시대)|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소하는 산시성 남정에 남아 파(巴)와 촉(蜀) 지방을 진무하고 법령을 반포하여 이 지역을 확실한 한나라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삼진을 평정하는 한나라 군대의 군량과 마초는 모두 여기서 끌어올린 부세 덕택이었다. 기원전 205년, 삼진을 평정한 유방이 마침내 여러 제후들과 함께 [[초(춘추전국시대)|초(楚)나라]]의 [[항우]]에게 도전할 때, 소하는 같이 움직이지 않고 훗날의 [[혜제(전한)|혜제]](惠帝)인 [[태자]] 유영(劉盈)과 함께 섬서성 임동현 동북쪽인 역양(櫟陽)에 남아 관중(關中) 지방을 지켰다. 소하는 단순히 관중을 지키기만 한 게 아니라, 한나라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궁실을 건축하며, 법령과 규약을 제정하고 관중 각 지역에 군과 현을 두어 행정조직을 완비했다. 즉, '''혼자서 국가의 기반을 마련해놓은 것.''' 소하는 이러한 일을 할 때마다 유방에게 보고했으며, 유방에게 보고하기 힘들 때는 알아서 적절하게 처리하고 유방에게 보고하면 유방은 별말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소하가 담당한 지역은 어디 촌동네가 아니라 관중과 파촉으로, 이 지역들은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가 나머지 육국을 압도하여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었던 지역이었다. 혼란한 시기라서 옛날의 그 힘은 온전히 나오지 않더라도, 제대로 다스리기만 하면 최소한 항우의 세력에 비해 경제력에서 밀릴 이유는 없었던 것. '''문제는 진나라가 멸망하며 무너진 행정조직을 복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소하가 해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물론 여기에는 앞서 소하가 진나라 왕성을 접수하면서 빼돌렸던 문서나 서적, 서류 등이 큰 역할을 했으며, 항우 스스로 관중의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고 유방은 오히려 그들을 위무함으로써 관중 사람들의 항우에 대한 전쟁의지가 남다르게 되었단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후 항우와 유방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소하가 마련해놓은 기반이 빛을 발하게 되었는데, 유방이 항우를 붙들어 놓으면서 숱한 패배로 인력과 물자를 잃었지만 후방에서 쏟아지는 보급이 그런 손해를 충분히 메워주었던 것. 유방이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항우의 공세를 견뎌내고 있는 사이 한신의 군대가 북방을 완전히 쓸어버리면서 대세가 기울었다. || [[파일:/20120119_234/13269192910591zei1_JPEG/K-4_%282%29.jpg|width=100%]] || || '''형양(滎陽)의 위치''' || 이를테면 [[팽성대전]]의 사례가 있다. 팽성의 싸움에서 60만 대군이 처참하게 박살나자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한신과 합류하고 패잔병을 수습하며 재기를 시도했는데, 이때 소하가 관중의 노약자들까지 끌어모아서 병력을 만들어 보내주었고, 유방은 이 병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초나라 군대를 격파해서 대치 상황을 이루어냈다.[* 항우본기의 팽성 전투 기록에 소하의 언급이 나온다. 즉 적국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마주칠 리도 없는 후방 보급관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것이니 도대체 어떻게 한나라 쪽은 병사들과 보급이 마르지 않냐는 의문이 초나라 군대에 팽배했다는 얘기이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와 전쟁의 승패와도 직결되는 요소인데,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진지를 점령한 롬멜 장군이 불과 5일 전에 미국에서 발송된 편지가 아프리카의 최전선 진지에 도착해 있는 것을 보고 패배를 직감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훗날 유방이 회상하기를 남은 병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방도가 없어서 관중 땅 전체를 포기하고 물러서려고 할 때 이미 10만이 넘는 병력이 몰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병력을 본 유방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 만약 소하의 조치가 없어서 유방이 농성에 실패했다면 유방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은 물론, 구심점이 없어진 다른 장수들도 합류하지 못하고 흩어진 채 각개격파당하면서 [[이릉대전]] 때의 촉한 이상으로 피해가 나왔을 수도 있다. 때문에 유방은 다른 공신들의 공은 전체로 따지면 일부지만, 소하는 그렇지 않다고 평가한 것. 게다가 이 과정에서 나올 법한 내부의 분란도 일어나지 않도록 잘 수습했다. 아무리 관중과 파촉의 생산력이 막대하다지만 노약자까지 동원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인력과 물자를 뽑아내다보면 불만이 없을 수가 없으며, 최악의 경우 백성들의 집단 봉기나 초나라와의 내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나마 항우 쪽에서 이미 [[신안대학살]] 등으로 관중의 여론을 완전히 망가뜨려놓은 덕분에 내통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내부의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은 것은 소하 덕분이었다. 이때 유방은 항우를 막는 데 바빠 자신의 본거지인 관중을 소하에게 전적으로 맡겼는데, 유방은 소하가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시도때도 없이 사람을 보내 소하를 칭찬하고 있었다.[* 유방과 항우의 성향과 태도가 180도 다르다는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측근이 의심가는 상황에서 유방은 이렇게 칭찬을 하거나 상을 내려줘서 덕으로 포용하려 한 반면, 항우는 너무 솔직하게도 갖고있던 의심을 계속 증폭시키며 대놓고 견제를 해버려서 결국 해당 인물을 죽이거나 떠나가게 만들었다.] 이때 포생(鮑生)[* 포씨 성을 가진 벼슬하지 않은 선비 정도로 보면 된다.]이라는 사람이 소하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한왕은 전장에 나가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자를 여러 번 승상께 보내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왕이 승상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승상을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승상께서는 자식과 손자 및 형제들 중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모아 모두 한왕에게 보내 한왕의 싸움을 도와 온 힘을 다하라고 하십시오. 한왕은 필시 승상에 대해 안심을 하고 다시 신임을 할 것입니다. 이에 소하는 그 말대로 시행했다. 이후 진짜로 유방은 소하에 대해 안심하고 마음을 놓게 된다. 가장 군주에게 의심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뛰어난 처세술로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소하의 도움 등에 힘입어 BC 202년,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