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헌왕후 (문단 편집) == 평가 == [[세종(조선)|세종대왕]]이 [[조선시대]] 내내 '''이상적인 [[성군]]의 대표격'''으로 꼽혔듯이[* [[조선시대]] 신하들이 왕들에게 했던 얘기가 "[[세종(조선)|세종대왕]]과 [[성종(조선)|성종대왕]] 좀 본받으십시오!" 였다. 심지어 함께 [[성군]]으로 꼽히던 [[성종(조선)|성종]]조차 [[세종대왕]]을 본받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소헌왕후 역시 조선시대 내내 '''사상 최고의 [[왕비]]'''로 칭송받았다. 소헌왕후가 이끌던 [[내명부]]는 [[조선시대]] 통틀어도 가장 안정적이었다.[* 특히나 세종 때에는 내명부에 [[후궁]]이 많은 편이었다. 그 중 [[세종(조선)|세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전해지는 [[신빈 김씨]]의 경우에는 자녀를 8명이나 낳았는데, 소헌왕후는 김씨와 별다른 잡음 없이 지냈고 오히려 둘째 아들인 [[세조(조선)|수양대군]], 막내 아들인 [[영응대군]]의 양육까지 맡길 정도였다고 한다. 후궁들을 잘 이끌고 큰 문제없이 내명부를 통솔한 것만 봐도 소헌왕후가 얼마나 왕비로서 역할에 충실했는지 알 수 있다.] 세자빈들 사건이 있긴 했으나, 이후의 훨씬 다사다난한 조선의 내명부 역사[* 특히 '''[[성종(조선)|성종]]''' 때나 '''[[숙종(조선)|숙종]]''' 때를 보자]를 생각하면, 세종 때의 내명부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다. 앞서 언급된 [[세자빈]]들의 불미스런 사건은 소헌왕후는 물론 [[세종(조선)|세종]]조차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며느리들이 [[막장]]이었을 뿐이므로, 그녀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 남편과 자녀들(8남 2녀)을 상당히 잘 둔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일단 남편은 [[세종대왕]][* 물론 [[세종대왕]]이 능력 있는 남편이고 부부 간에 금슬도 좋기는 했지만, [[후궁]]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속앓이를 다소 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세종의 자식 20여 명 중 10명은 소헌왕후 소생인 걸 보면, 세종대왕이 어쨌든 소헌왕후를 아꼈음은 사실인 듯하다. 앞서 보았듯이 [[심온]] 사건과 그 이후의 일로 나름의 죄책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례해서 다른 쪽으로 잘해주려고 했을지도.], 장남은 [[문종(조선)|문종]], 차남은 [[세조(조선)|세조]], 3남은 [[안평대군]] 등등 화려하다. 두 딸 [[정소공주]]와 [[정의공주]] 역시 총명하였으며, 자세한 가족관계는 [[세종(조선)/가족관계]]를 참조. [[세종(조선)|세종]] 또한 이런 왕비를 극진히 대했으며, 소헌왕후는 '''역대 조선의 왕비 중 왕과의 사이에서 2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왕비'''[* [[조선/역대 왕비|역대 조선의 왕비]]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비는 아이러니하게도 남편과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태종(조선)|태종]]의 왕비이자 소헌왕후의 시어머니 '''[[원경왕후]]'''이다. 원경왕후가 태종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양녕대군]]에 앞서 세 아들을 더 낳았고 성녕대군 이후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더 낳았었다. 다만 넷 모두 요절해서 별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8남 4녀를 낳았던 것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2003_003|이 내용은 상왕으로 물러 앉은 태종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남긴 말로]], [[조선왕조실록]] 세종 원년(1419) 2월 3일 기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이기도 하다.(총 '''8남'''[* 조선 왕실에서 대군 칭호를 받은 왕자가 가장 많은 왕이 태조와 세종인데(둘 다 8명), 태조는 2명의 왕비에서 얻었으나 세종은 오직 소헌왕후 1명에서만 8명을 얻었다. 다른 왕들은 8명은커녕 대군이 많아야 4명(태종, 인조)일 정도인 걸 생각하면 압도적인 수준이다. 특히 인조 후로는 왕비 소생 왕자가 없거나(숙종, 경종, 영조, 정조, 헌종, 철종, 순종) 1명(효종, 현종, 순조, 고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2녀) 이처럼 [[왕비]]가 자식을 많이 본 게 내명부가 안정적이었던 가장 큰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통성 있는 대군이 8명이나 있으니, 한둘 정도 문제가 생기더라도(실제로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은 소헌왕후보다도 먼저 죽었다.) 큰 문제가 없었던 것. 후궁들도 감히 왕위계승에 끼어들 수 없었으므로 자중했을 것이다.[* 세종이 처음으로 후궁 소생 왕자를 얻은 게 세종 7년(1425)인데 이 시점에서 소헌왕후 소생 왕자만 '''5명'''(문종, 수양대군(이후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이었고 금성대군을 임신 중이었다. 문종이 1414년생으로 서자들 중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1425년생 [[화의군]]보다도 11살이 많았으니 서자들이 커서 뭘 해보려고 해도 그땐 이미 왕세자인 문종의 입지가 단단히 다져지고 난 뒤이다. 애초에 서자들은 물론이고 적자인 대군들(심지어 세조마저도)도 문종 생전에는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문종의 입지는 매우 견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장자+세자+대리청정이라는 탄탄한 정통성을 갖고 있었으니...]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낳다 보니, 위에서 언급했듯이 생애의 중요한 순간을 [[임산부]]의 몸으로 맞은 경우가 많았다. 왕비 즉위식 때는 [[안평대군]]이 태어나기 1달 전이었고, 친정아버지인 심온이 숙청당할 때는 4남 [[임영대군]]을 [[임신]] 중이었다. 그리고 한성 대화재 진압을 지휘할 당시에는 [[금성대군]]이 태어나기 약 1달 전이었다. 소헌왕후 본인 다음으로 많은 소생을 둔 [[신빈 김씨]]와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신빈 김씨|김씨]]는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낳은 직후에는 [[세조(조선)|수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乳母)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빈의 소생들은 [[세조(조선)|수양대군]]과 친했으며, 뒷날 세조는 신빈과 그 소생의 이복 아우들을 자신의 가족들처럼 정말 극진히 대해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