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현세자 (문단 편집) == 평가 == 소현세자가 조선인 포로 쇄환이나 각종 [[외교]]적 현안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현명하게 처신한 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볼모 생활 중 보인 변화를 통해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성리학]]적 가치에 회의를 느꼈고, 아담 샬과 교류하며 [[가톨릭]]에 호의를 가졌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심양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 등이 번역된 오늘날에도, 이런 평가는 대중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를 파고 드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소현세자의 이런 기존 이미지들이 과장이나 허구라고 여기는 수정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기묘하게도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 간의 입장을 조율하는 본인에게 버거운 임무를 수행한 나머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지병을 달고 사는 허약 체질의 환자였으며, [[왕세자|세자]]로서의 할 일은 했지만, 딱히 기존 질서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 적도 없는, 매우 심약하고 수동적인 존재였다. 여기에 희한한 확증 편향이 붙기도 한다. 아버지 [[인조]]는 이 심약하고 못 미더운 데다가 청나라의 앞잡이가 될 것 같은 아들이 결국 골골거리다 죽자, 건강하고 장성한 [[봉림대군]]을 계승자로 확정짓기 위해, [[조선]]의 200년 미래를 위한 단호하고 현명한 정치적 결단을 했으며 그것이 소현세자 가족의 숙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인조]]가 맏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방대한 기록들이 새로이 연구되면서 기존의 학설을 뒤집어보기 위해 가장 첫 번째로 공격 목표가 된 인물이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은 소현세자이고, 그만큼 피해를 본 것도 소현세자인 것 같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일기는 여러 세자들의 일기 중 가장 먼저 번역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만 진짜 자료이고,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아담 샬]]의 《회고록》은 무시하거나, 허구라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승정원 일기]]》를 토대로,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록들을 발췌해,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당대 사람들만이 아는 팩트나 분위기, 맥락을 첨가해 정리한, 어떤 의미에선 더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는 사료이다.[* 물론 실록이 왜곡이나 편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록은 워낙 기록이 많아서 그런 왜곡이나 편향에 대한 단서 정도는 잡을 수 있다.] 실제로 1차 사료인 《[[승정원일기]]》엔 간략히 나온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선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승정원일기]]》에 없었던 일까지 덧붙여 훨씬 자세히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기존 사료는 틀렸고, 새로운 사료가 진실이다라는, 뭔가 극적 반전을 갈망하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 보단, '''양자를 모두 사료로 인정하고 상호 보조하며 보는 것이 소현세자의 실체에 더 정확히 다가서는 길로 보인다.''' 이런 수정주의의 두 번째 허점은, 소현세자의 《[[동궁일기]]》나 소현세자의 《[[심양일기]]》를 소현세자 개인이 쓴 일기인 양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 사료들이 정말 소현세자의 개인 저서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루지 않는 다양하고 시시콜콜한 주제에 관해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소현세자의 철학이나 내면,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우선해도 좋을 만한 공신력을 가질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료들 역시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소현세자를 바라보는 사관이나 시강원 스승들의 눈으로 씌여진 것이며, 분량만 많다 뿐이지, 주제는 비슷하다. 세자의 공적 영역 언행들, 사관들 앞에서 한 말들을 발췌해 담고 있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처럼 앞뒤 맥락을 부연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별로 없다. 마치 그날의 의무처럼, 날씨, 왕의 위치, 공식 행사등 정해진 주제에 대해 간략한 메모들만 나열해 놓기 때문에, 수백년 후 현대인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맥락을 창조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이 산으로 갈 위험도 있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 소현세자의 인성이나 성향에 대한 총평, 즉, 당대 사람들이 바라본 소현세자의 총체적인 인상이, 당연히 사료들을 해석하는 참고자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 소현세자가 심약하거나 병약해서 국본([[왕세자]]) 노릇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걱정된단 식으로 보는 시선은 없다. 또한 소현세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그의 졸기를 보건대, 머리는 좋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특히 조선 사회의 주류층인 성리학자들과 거리를 뒀던 듯 >도량이 넓지 못하다.(器量不弘) 즉,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린다는 식으로 비판받았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코드가 맞는 이들은 무인들 및 노비들이었다. 하지만 그 방대한 《[[동궁일기]]》나 《[[심양일기]]》의 화자들은 정통 성리학자인 사관이나 시강원 스승들이었다. 그들이 자신들과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고, 필요한 말만 했을 소현세자의 속내나 실체를 온전히 파악했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소현세자가 사관들에게 말을 아끼고 거리를 두는 성향은 볼모 생활 때만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궁일기]]》를 보면, 어린 소현세자는 성리학 교재를 반복 암기시키며 강압적으로 다그치는 스승들을 버거워했으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동공 대지진이 일어나거나 구토를 하는 정서 불안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도세자]]처럼 막 갔다는 이야긴 아니다. 결국 소현세자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따르며 훌륭한 국본([[왕세자]])으로 거듭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소현세자가 강압적인 스승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편하게 털어놓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애초에 소현세자는 만 11세가 되어서야 아버지 능양군이 반정에 성공해 왕의 후계자로 대우받았고, 반정 이전까지는 정원군 의 가계가 광해군 정권의 집중 견제대상이라 후계자 수업은 고사하고 평범한 글공부조차도 책이나 안 잡힐까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그나마도 중간에 [[이괄의 난]]으로 인한 피난 생활까지 겹치면서 만 13세가 되어서야 공식 세자 책봉을 받고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정묘호란]]으로 분조를 이끄는 등 만 16세가 될 때까지도 학업에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원래 정상적으로 궁에서 태어난 왕의 적장자라면 '''글을 읽을 때가 되면''' 원자부(인조대 이후 강학청)가 설치되어 그 빡센 수업 일정을 몸에 배이게 했는데, 소현세자는 그 과정을 최소 7년이나 늦게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저 강압적인 스승들 앞에서 엇나가지 않고 커리큘럼을 성실하게 따라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대충 비슷한 연령대에서 후계자가 된 [[이방석]]에 대해 실록에 뭔 이야기들이 실렸는지만 봐도 차이가 크게 난다.][* 그나마 《[[심양일기]]》에서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사관들 앞에서 밝힌 소현세자의 심리는, 여인도 사냥터에 말 타고 참여하는 [[청나라]]의 문화를 보고 느낀 쇼크, 그리고 몰락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애환, 조선인 포로들의 애환 등이다. 최근에 나온 소현세자에 대한 창작물엔 이런 점들이 적극 반영된다.] 예컨대 《[[동궁일기]]》나 《[[심양일기]]》만 읽다 보면, 소현세자는 평생 [[강빈]]과 감정적인 교류가 거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관들이 그런건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강빈]]이 1년에 손꼽을 정도로만 말을 섞다가, 어쩌다 잠만 한번 자면 바로 아이가 떡 생겨버리는 이미지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심양일기]]》는 소현세자의 눈병이나 감기에 대한 기록은 남겨도, 자녀 출생은 일절 기록하지 않는 바람에 《[[심양일기]]》만 보면 대체 군주와 왕손들이 어디서 왔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좋은 금슬은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일련의 기록과, 그들이 자식을 만든 숫자와 타이밍에서 유추된다.[* 두 사람의 첫 딸은 결혼한지 1년도 안 되어서 태어났고, 셋째 딸은 [[1637년]](인조 15년)생인데, 이 아이가 만들어질 때 소현세자는 [[인열왕후|모친]] 상중이었다. 막내 유복자 아들은 《[[동궁일기]]》와 《[[승정원일기]]》의 진료기록이 쏟아지던 소현세자가 죽기 직전, 건강이 잠시 회복되었을 때 만들어졌다.] 《[[심양일기]]》나 《[[동궁일기]]》가 소현세자의 전부라고 여기다 보면, [[아담 샬]]의 회고 같은, 소현세자의 개인 생각이 드러난 희귀한 자료는 어떻게든 허구로 몰아붙이거나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다. 《[[심양일기]]》만 보면 소현세자는 가톨릭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소현세자가 가톨릭을 처음 접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베이징시|북경]]에서의 70여일 간, '''《심양일기》는 쓰여지지 않았다.''' 한편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강빈]]의 황무지 개척 사업은, [[조선]]의 전통 농업 경영 방식이 [[청나라]]에서 대박을 낸 케이스이다. [[청나라]]는 [[1641년]](인조 19년) 12월부터, 심양관에 별도의 정착 비용을 지급하는 대신 토지를 주어, 심양관 식구들이 농사로 자급자족하게 했다. 사실 많은 대신들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 두 번 다시 고향에 못 돌아가리라 생각해 반대했지만, 강빈은 황무지 경영에 찬성하고 적극 주도했다.[* 이후 [[청나라]]는 심양관에 1번씩 담비가죽, 담요, 낙타, 노루 등 예물을 보냈고 이에 심양관 측에서도 조선산 과일이나 은제품을 답례품으로 보냈다. [[청나라]] [[황족]]이 사적으로 상업 거래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고, [[청나라]] 관리들도 많이 만나야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돈과 귀중품이 많이 필요했다.] 사실 [[민회빈 강씨|강빈]]의 황무지 경영은 사대부 여인들의 경제관리능력 중 하나였다. 당대의 사대부 안주인들은 집안 살림은 물론 인력 고용과 품삯 지불 등 자산 운용과 경영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황무지 경영 능력을 만약 강빈만이 가지고 있었던 탁월한 능력이라고까지 해석한다면 분명 과장이다. 하지만 [[민회빈 강씨|강빈]]의 능력을 심하게 과대평가하는 시각도, 애초에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황무지 개척을 시작한 차기 국모의 적절한 결단력을 좋게 보고, 실제로 부가 축적되어간 속도를 보고 놀라는 것이지, 무슨 [[조선시대]] 여자가 농사 스킬이 있느냐고 놀랄 정도로 무지한 게 아니다.[* 《[[심양일기]]》를 소현세자, 더 나아가 [[민회빈 강씨|강빈]]의 개인 일기로 착각하며, 《[[심양일기]]》는 마치 자신들만 읽어 봤고, [[민회빈 강씨|강빈]]을 칭찬하는 다수의 이들은 논문 한편 읽어본 적 없을 거라고 폄하하는 독단적인 일부의 주장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생산을 관리하는 게 주로 사내들의 영역에 해당하고, 안주인은 곳간 살림 같은 소비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으로 나누어지는 게 전형적인 사대부의 패턴이었다면, [[민회빈 강씨|강빈]]은 직접 사내의 영역인 생산 영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자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사관 보고서에 손을 대는 바람에, 나중에 [[인조]]에게 꼬투리를 잡히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렇게 황무지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 썼다는 점이다. 순전히 백성들을 구출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이 활동 역시, 나중에 [[인조]]에게 사병이라도 기르는 거 아니냔 의심과 미움의 구실이 된다. 《[[심양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가 사료로서 낸 성과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술했듯, 소현세자의 죽음이 기존의 인식대로의 독살이 아닌 병사의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병자호란 이전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아이가 원손 하나가 아니고 셋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만, [[심양]] 생활이 길어지면서 소현세자가 골골거렸다는 주장은, 소현세자의 질병 사망설만 진실로 확증하고 타살설을 원천 부정하는 주장의 확증 편향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의 소현세자 진료 기록들이, 여러 논문들에서 적극 인용된 건 사실이지만, 이는 죽음의 진상 규명을 위한 심층적인 추적이었지, 소현세자를 허약체질 병약자로 몰아가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앞의 두 사료에 더해, 《[[조선왕조실록]]》 기록까지 합치면, 소현세자는 볼모 시절 후기, 유목민처럼 말을 좋아하고 무인들과 노비들과 어울리며 사관들에게 까이는, 허약체질 환자하곤 거리가 멀어보이는 생활을 영위중이다. 게다가 심양관 생활이 후기로 갈수록, 현대의 대박난 사업가 마냥 생활은 여유로워지며,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강빈]] 사이에서는 금슬이 좋던지 아이들이 더 자주, 많이 태어나게 되었다. 사실 [[조선왕조]]에서 왕-세자간의 패륜적 갈등, 혹은 숙청에 준하는 현대인들의 흥미를 끌거나 감정 이입을 유발하는 사건들은 비일비재했다. 후계 문제를 둘러싼 [[선조(조선)|선조]]와 [[광해군]]간의 정치적 대립이 그러했고, [[영조]]가 학대 끝에 정신병자 살인마가 된 [[사도세자]]를 숙청한 일이 그와 같다. 하지만 최근 나름의 다채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거나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광해군]]이나 [[사도세자]]의 케이스와 달리 소현세자의 케이스는 [[인조]]의 일방적 잔혹함만으로 알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인조]]는 역사적인 사례를 돌이켜보아도, 개인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서도 소현세자에게 심대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전후 상황이었다. [[고려]]의 [[원 간섭기]]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왕과 세자가 서로 파벌을 이루어 대립하던 경우'''나, 반원정책을 펴는 [[공민왕]]을 견제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려 한 것과 같이 중국이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 왕족을 내세워 정권을 갈아치우려 한 전례가 있었다. 비 한족 계열 중원 제국에게 국권을 침해당한 조선의 군주 입장에서는 중국의 동향에 정국이 요동치거나 최악의 경우 '''중국의 황제가 군주를 다른 왕족으로 대신하려 들던''' 이런 공포스러운 과거사를 상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조선/왕사|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년]], 정축) 1월 28일 기사 >이에 앞서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 이르러 졸한 것이다. >---- >인조 26년 9월 18일 기사,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의 졸기 게다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청태종]]이 친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유사시에 소현세자를 [[인조]]의 대체재로 삼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은근한 위협을 가했고, 소현세자가 죽자 '''그 아들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이 현실이어서 실록의 기술처럼 소현세자나 그 혈통의 말로가 좋지 않게 끝날 것이라는 건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독살되고 가족들까지 연이어 살해당한 것은 비록 방법이나 과정이 잔혹하지만 [[인조]] 개인의 [[편집증]] 탓보다는 권력의 생리이며, 한반도에서 이미 수 차례나 벌어졌던 과거사를 돌이켜볼 때 충분히 예상된 비극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다. 단지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인조]]의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패륜적 잔인성이 문제였다. 이것은 충분히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의 군주로서 심각한 결격사유로 지적받을 수 있는 부분이었고, 사관들까지도 곳곳에서 증거도 없이 아들의 일가를 몰살하려 드는 [[인조]]를 힐난했다.[* 인조는 며느리를 두고 "개새끼 같은 것들을 임금 자식이라고 하니 이게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라며 욕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하들이 그래도 며느리는 자식이나 다름없으니 관용을 보여달라고 한 것에 대한 답이다.] 왕이 내뱉는 욕설은 보통 "입에 담지 못할 하교"등으로 돌려 기록할 뿐, 직접 사관이 단어를 써서 기록한 것은 전례가 없다. 사관은 손자인 [[경선군|이석철]]의 졸기에서도 "독기가 많은 [[제주도|제주]]에 어린이를 유배보내 놓고 불쌍하다며 아비 곁에 묻어주라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하며 논평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강빈]] 사건을 두고 사관이 자신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수위로 제 아들 일가에게 차마 내뱉기 어려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죽이려 드는 [[인조]]의 잔혹함을 비난했다고 볼 수 있다. 사관은 강빈이 사사된 날에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라면서 역시 별 근거 없이 역당으로 몰려 죽은 강빈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어디까지나 마키아벨리즘적 왕권 확립보다는 절차적 법질서와 도덕적 흠결 여부를 중시하기에 소현세자의 죽음에 얽힌 수상한 전후 정황과 그 과정에서의 지나친 잔혹성, [[민회빈 강씨|강빈]]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부당한 [[사법살인]]으로 여겼다.[* 인조의 목적론과는 별개로 그 과정에서 남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논란거리가 되겠지만 그래도 왕의 뜻을 존중하는 쪽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소현세자 일가의 몰락 과정은 어느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였다. 즉 인조가 청나라의 입김을 받은 소현세자 일가를 처리하려고 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럼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도 갖추어야 했는데 인조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명분이야 민회빈 강씨가 자신을 독살하고 저주하려 했다는 것이지만 조선 왕조의 기록을 보면 그 주장이 무색하게 만드는 구절이 가득하다.[* 가령 독살하려고 했다는 대목은 당시 강빈은 감금 상태에 놓여있었으며 그래서 이후 김홍욱이 강빈의 사면을 청하는 글에서도 이 사건이 강빈의 잘못이라 했는데 당시 강빈의 사정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저주 문제도 이는 강빈 사후 1년 뒤의 일로서 강빈을 모시던 이들 중 배신한 신생의 주도한 일인데 문제는 왕을 저주했다는 것은 더할나위없는 대역죄인이라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드러내서 강빈 사사의 명분으로 써먹으면 그만인데 강빈이 죽은 후에야, 그것도 1년씩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때문에 목숨을 걸고 구명이나 복권, 재조사를 호소한 관료층들을 통해 점차적으로 소현세자 일가에 대한 동정론이나 구명론이 형성되었다. 또한 [[임진왜란|양]][[병자호란|란]] 이후 급격히 교조화된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질서에 답답함을 느끼거나 [[조선]]의 멸망에 [[유교]]가 책임이 있다고 보는 현대의 대중들의 상상력을 서양 문물과 접촉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던 소현세자가 꾸준히 자극하는 바도 동정론에 기여한다.[* "명분만 좇다가 나라까지 망해보았으면 교훈을 얻고 달라져야지 않는가? 오랑캐라 천시하던 이들을 보라. 인구도 우리보다 적은데 거대한 [[중국]]을 집어삼켰다."(《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 《인조실록》 편에서)] 고귀한 혈통에, 가혹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성공을 이루어냈고, 어떤 도덕적 결함을 보이거나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분투했음에도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관계 없는 주변의 정황 때문에 참혹한 운명을 맞이한 사람들을 대중이 영웅시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흥미롭게도, 민담이나 [[야사(역사)|야사]]에서는 소현세자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많다. [[숙종(조선)|숙종]] 대에 손처경이라는 사이비 교주가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사칭하다가 덜미를 잡혀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211001_001|참수형을 당했다.]] 사실 손처경도 뜬금없는 짓을 벌인 건 아니고 제자인 묘향으로부터 소현세자의 유복자 소문을 듣고 이에 편승한 것이다.[* 다만 이 점을 보면 민간에서 소현세자에 대한 동정론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효종(조선)|효종]]의 사위 정재륜이 지은 《공사견문록》과 조선 후기 야담을 집대성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소현세자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야사(역사)|야사]]들로 가득하다. [[세조(조선)|세조]] 때부터 동정론이 돌았던 [[단종(조선)|단종]]이나 무속에서 뒤주대왕으로 받들어진 [[사도세자]]와 달리 소현세자는 민간의 동정을 샀다 볼 만한 흔적이 없으며, 아둔하거나 난폭한 이미지로 묘사되어 거의 실제 역사상의 [[양녕대군]]을 방불케 한다. 예를 들어 본다. >1. [[인조]]가 세자빈을 간택하려고 하는데 아름답고 덕이 높은 처자가 일부러 미친 척을 해서 소현세자를 피했다. >2. [[심양]]에선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기이한 물건 모으기에만 열심이었다. >3. 심양관을 개수할 때 참여한 기술자 한명이 세자에게 아첨하자 흡족해하며 관직을 제수하려 해 이시백이 저지했다. >4. 시종하는 위사를 이유없이 마구 채찍질했다. 이중 1번은 [[민회빈 강씨|강빈]]의 가례에 관련된 기술에도 나와 있듯, 야사가 아니고 진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는 소현세자 본인의 매력이나 인성 문제이기보단, 당시 '인조의 큰아들'이 혼인 상대로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 왕자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미지와 달리, 조선시대 왕실 간택시 단자를 기꺼이 내고자 하는 사대부는 별로 없었다. 왕실 인척은 도리어 출세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까딱하면 [[민회빈 강씨|강빈]] 집안이 그러했듯, 본인 처신과 무관하게 친정 집안이 파멸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소현세자가 가례를 올릴 무렵, [[인조]]는 여러모로 불안정해 보이는 [[조선/왕사|왕]]이었다. 본인이 직접 일으킨 [[인조반정|반정]]으로 집권하며 [[창덕궁]] 태워먹었지, 이듬해 반정 공신 이괄에게 [[이괄의 난|뒤통수 맞고]] [[창경궁]]까지 태워먹지, 그 다음다음 해에는 [[정묘호란|오랑캐가 쳐들어와]] 본인은 [[강화도]]로, 세자는 [[전주시|전주]]로 피난을 갔다. 이래저래 정통성도 체통도 안정성도 떨어져 보이는 불안한 [[조선/왕실|왕실]]에 기꺼이 제 딸을 주고자 하는 사대부는 드물었을 것이다. 2번은 흥미롭게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진 소현세자 이미지와도 겹쳐보인다. 악의적으로 보면 저 모습은 게으르고 물욕이 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소현세자가 줄곧 [[유교]]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다가 경연을 소홀히 하며 신문물, 혹은 실용적인 부 축적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못마땅해 하던 이들 눈에 저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현세자가 정말 재물 모으기에만 집착하는 [[속물]]이냐면 앞서 보았듯 소현세자는 재물을 쌓고 그 재물로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였으며 청나라 내에서 인맥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과연 돈이 오고가지 않았겠는가?''' 잘 생각해 보면 소현세자가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모은 것이 세자로서 좋은 모습은 아닐지도 모르나 소현세자는 그 이상으로 차기 국가원수로서 할 일을 해냈다. 막말로 자국민 노예들은 청나라인 밑에서 고통받고 청나라 대신들은 툭하면 세자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경전에서 나오는 말만 외워서 뭐에 쓰겠는가? 병자호란 이후 쓸데없을 정도로 명분론이 강해진 조선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 비판은 논할 가치가 없다.][* 또, '기이한 물건'이라는 게 나름 부정적인 서술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문물인데 기록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청나라 물건이라 안 좋게 보여서 그렇게 서술했을 수도 있다.] 3번 역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소현세자 이미지와 겹쳐보인다. 기술자가 아부를 해서 관직을 제수한 걸까? 아니면 기술자를 장인이라고 딱히 천시하지 않아서 관직을 제수하고 싶어한 걸까?[* 비슷하게 성종의 경우 훈구, 사림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신들을 문반직에 써준다든가 아니면 남반(중인)들에게도 문반직을 세수하기도 하여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4번은 있을 수도 없을수도 있는 일인데, 최소한 《[[심양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소현세자의 모습- 자제력이 뛰어났다거나, 외교 업무를 현명하게 수행한다거나, 온화한 성품으로 가마꾼들의 노고까지 세심하게 신경썼다거나, 남한산성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 자청했다거나,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후 제 형을 [[민회빈 강씨|강빈]]과 세트로 묶어 겁나 까면서도 '형이 성품은 착했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미지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무튼, 민담이나 [[야사(역사)|야사]]에서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나쁜 이미지는, 반청 혐오가 고조된 사회에서, 대청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룬 소현세자의 행보에 대한 당대인들의 몰이해와 반감 플러스, 효종•현종•숙종으로 내려오는 삼종혈맥의 왕실 라인에서 정통성 때문에 견제를 샀기 때문으로 해석가능하다. 실제로 《공사견문록》을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효종(조선)|효종]]의 사위였다. 그는 소현세자가 죽고 그 아들들이 죄인 자식이 된 덕에, 자신은 공주 아내를 얻어 [[창경궁]]에 별장까지 얻어 잘 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로선 소현세자의 평판을 망칠, 즉 왕이 될 깜이 못되었다고 이미지가 망가지길 원하는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요컨대, 소현세자에 대해 오늘날 대중이 가진 좋은 이미지가 허구이고, 민담이나 야사에 드러나는 이미지가 진실, 혹은 소현세자에 대한 나쁜 이미지와 반전을 열망하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라는 근거는, 아직까지는 희박하거나 쌩뚱맞은 거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