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속주 (문단 편집) === [[아나톨리아]] === '''Anatolia''' 로마의 돈셔틀 2이자 그리스와 함께 가장 부유한 지역. 또한 기병 셔틀 3.[* 실제로 동로마는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소아시아를 점점 상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기병의 공급처인 목초지가 없어짐으로서 기병의 양과 질이 줄어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물론 12세기 [[알렉시오스 1세]]-[[요안니스 2세]]-[[마누엘 1세]]로 이어지는 콤네노스 황조 시대의 [[회광반조]] 시기에는 소아시아 상실로 인한 악영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후 암군들의 등장과 함께 [[십자군]]에 의한 [[십자군 전쟁|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세기의 위기 때 로마 군사들 대부분은 [[페르시아]] 및 [[파르티아]]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하고 반격하기 위해 쳐들어 가는 것을 마치 '''스페인인들이 [[엘도라도]]를 정복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들 지방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 초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거나 종속 관계를 맺었고, 제정 시대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 여러 지방 중 처음으로 살아있는 황제가 이 지역 주민들의 요구로 최초로 개인우상화되면서(기원전 29년), 황제우상화 정책이 시작됐다. 또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시절, 이 지역 태생의 그리스혈통 주민들이 로마시민권을 많이 하사받아, 성씨로 클라우디우스를 사용한 이들이 꽤 많이 보이는 것도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다. 이런 이유로 서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등장한 집정관이나 총독 명단 중 노멘(성씨)로 클라우디우스를 사용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열 중 여덞, 아홉명은 거의 대부분 소아시아 태생이나 그리스인들의 후손이다.[* 클라우디우스 1세 때 원로원과 황제가 입법한 시민권 특칙에 따라 오스티아 항구 개발로 인한 무역업 피해자와 그리스어 교사들에게 시민권을 마구잡이로 뿌린 결과다.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 집정관을 지낸 이 중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oooo,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등을 사용한 이들 중 상당수는 그리스인 내지 아나톨리아인, 혹은 북아프리카 출신들이 많다.] 고대 그리스 및 중근동 지방과 함께 고대 로마 제국 안에서 높은 선진 문화의 본거지였고, 이 동네에서 유행해 로마로 수출된 스포츠 경기나 유흥문화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배경처럼 사도 [[베드로]], [[바울로]] 등 1세기 [[사도]] 및 [[교부]]들의 주 무대.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당장 신약성경 에페소스서, 갈라티아서, 콜로사이서가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졌는지 생각해보자.] 후대의 소위 동로마 암흑기(Byzantine Dark Ages)에는 수도만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유럽의 콘스탄티노플에 두었을 뿐, 소아시아가 로마의 본국, 본토 거의 그 자체였던 시기도 있었다. 특히 920년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대제]]가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남하했을 정도로 발칸 반도를 석권하고 나서, [[스뱌토슬라프 전쟁]]의 대패로 불가리아의 세가 확 꺾이는 970년 전후까지는 '이 나라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왕국이다!'라고 이 시기의 동로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거짓말해도(...) 충분히 속을 만한 정도이다.[* [[파일:QXT5KdnDXHd_KPFcfdfX-LEAVSJrHKIgfpl7lzOtado.png|width=50%]] 발칸 반도의 형세가 대강 이랬지만, 다소 오류가 있다.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가 저렇게 커졌던 것은 소위 [[시메온 전쟁]]의 결과이고, 그 이전에는 저 지도만큼 넓지는 않았다(애초에 시메온 전쟁으로 저렇게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시메온 1세]]가 '대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에 같이 표시되어 있는 [[대 모라비아]]('Great Moravia')는 907년에 멸망했다(...). 그리고 [[동프랑크 왕국]]도 911년에 카롤루스 왕실의 직계가 끊어짐으로써 [[독일 왕국]]으로 바뀌었는데도 동프랑크라고 쓰여있고, 안티오키아 지역은 969년부터 다시 동로마령인데도 벌써부터 동로마령으로 나와 있으며, 시칠리아도 902년 이후로는 거의[* 거의 라고 쓴 이유는, 그 이후로도 적어도 60년 이상은([[니키포로스 2세]] 때 작정하고 수복하려 했다가 실패한 960년대까지) 동로마와 가까운 북ㆍ동해안 쪽 위주로 일시적으로 회복되었거나 자체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동로마 측에 붙었던 경우가 몇번 있었기 때문인데, 금방 진압되거나 축출되어 별 의미는 없어서 그냥 이거는 무시하고 '이슬람 세력이 동로마 세력을 902년에 일소시키고서 완전 장악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완전히 이슬람에게 넘어갔는데, 여기서는 여전히 동로마 영역으로 나와 있는 등 서로 시간상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 공존하는 것이다.] 7세기 혼란기에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제국 영내에 들어와서 눌러앉은 슬라브인들을 780년대 [[콘스탄티노스 6세]] 때 복속시키거나 동화시키면서[* 이에 관련된 [[https://en.wikipedia.org/wiki/Sclaveni|Sclaveni]]([[슬라브족의 이동]]으로 눌러앉은 슬라브인들) 문서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오는 즈음에서 re-Hellenized(-zation), 즉 재 그리스화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와 있다.] 발칸 반도를 본격적으로 수복해 나갔을 때까지의 발칸 반도에서의 제국의 판도도 대동소이했다. 그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라벤나 총독령 및 베네치아, 크레타,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이런저런 해상 및 서방 영역 또한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10세기 중반에는 이탈리아 본토의 남부 일부와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해]]변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상실했다. 참고로 아나톨리아 지역은 [[안드로니코스 3세]]가 아나톨리아를 포기하고 [[4차 십자군]]으로 잃었던 그리스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1330년대에 전부 [[오스만 제국]]에 복속당해 소멸했다. * '''해당 속주''' * '''[[비티니아]] 속주(Provincia Bithynia)'''[* 사실 비티니아 속주는 폰투스 속주와 함께 오랫동안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Bithynia et Pontus)'''라는 한 속주로 묶여 있었다.] ♠: 소아시아 서북부(현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 북쪽으로 흑해에 면해있다. 주도는 [[니코메디아]](현 터키 이즈미트)이다.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에서 바로 바다 건너라서 후대에는 반쯤 [[수도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가 소아시아 중 동로마까지 포함하면 가장 늦게까지(1330년대) 영유하고 있던 곳이다.[* 한편 소아시아에서 최초로 로마 영토가 된 소아시아 서해안 지역은 고대 로마 당시의 본거지였던 서쪽의 로마 시 및 이탈리아 반도와 가장 가까웠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시기에 따라 본거지가 달랐을지언정) 본거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가장 먼저 얻고 가장 나중까지 보유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아나톨리아 영토중 제일 오래 살아남은 영토로 1337년 니코메디아가 함락되며 소멸한다. * '''[[폰투스]] 속주(Provincia Pontus)''' ♠: 소아시아 북부(현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북쪽으로 흑해에 면해 있다. 주도는 폴레모니움(현 터키 파트사).[* 이곳에서 나중에 가장 잘 알려진 트라페주스(트레비존드, [[트라브존]])는 나중에 뜬 도시다.] 원래 이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미트리다테스 가문의 [[폰투스]] 왕국이 있었으나 기원전 2세기경 로마의 보호국 신세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세 번 전쟁을 일으켰으나 모두 패하고 로마의 속주 신세로 굴러 떨어졌다. 자세한 건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참조. 참고로 로마제국 후기에는 트라페준타 제국으로써 존속하기도 하였다. * '''[[아시아]] 속주(Provincia Asia)''' ♠: 여기가 소아시아 중 가장 일찍(기원전 133년) 로마의 정식 영토가 된 곳이다.[* 소아시아의 최서단이니 당시 본거지였던 서쪽의 로마 시 및 이탈리아 반도와 가장 가까웠기도 하다. 한편 동로마까지 포함하면 거의 마지막까지 보유하고 있던 곳은 소아시아의 북서쪽, 고대 로마 기준 지명으로 따지면 비티니아였는데, 당시의 본거지였던 [[마르마라 해]] 너머의 콘스탄티노플과 가장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시기에 따라 본거지가 달랐을지언정) 본거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가장 먼저 얻고 가장 나중까지 보유했던 것이다.] 허나, 비타니아 상실이후에도 필라델피아가 남긴 했다. 기원전 29년 아시아 속주 내 에페수스 주민과 아시아 지방의 여러 도시들의 요구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 하에 로마 여신과 디비 율리우스([[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신격화된 동네다. 티베리우스 즉위 후에도 재차 후임 황제 신격화를 요청하여, 로마 전역에 황제 신격화와 제전이 특권이 되고, 일반화되게 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아시아는 아니고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 최서단 지역을 말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대륙 이름 아시아의 유래가 이곳에서 유래되었는데 원래 [[에게 해]] 건너 그리스인 입장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최서단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부터 그 너머의 대륙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변화|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페르가몬 왕국]]이 있었으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가 기원전 133년에 사망하면서 후계자 싸움을 염려했던 것도 있고 어차피 아파메아 조약 이후로는 로마의 속국이었기도 해서 영토를 로마에게 '''유증'''해버렸다.[*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유언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도는 터키 [[에페수스]](현 터키 셀추크).[* 그리스 폴리스 시절부터 소아시아 서해안의 최대도시. 고대 후기에도 이 지역을 포함해 소아시아의 서·남부 거의 전체를 관할하던 아시아 관구의 치소였다. 하지만 지진, 항구기능 상실, 이슬람군의 침략으로 쇠퇴하고 나서 소아시아 서해안의 최대도시 위상은 스미르나에게 넘어가 스미르나(이즈미르)는 지금까지도 터키 전국에서 인구순위로 3위([[이스탄불]] 및 [[앙카라]] 다음으로)이며 소아시아 서해안에서는 당연히 최대도시이다.] [[신약]][[성경]] 에페소스서에 나오는 그 에페소스 맞는다. 또한 아시아 속주는 프리기아,[* 사도 바울로가 쓴 콜로사이서는 프리기아에 위치한 콜로사이라는 도시의 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쓴 서신이다.] 리디아 등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Notitia Dignitatum의 400년 기준으로 아카이아(아테네와 스파르타 주변), 아프리카(카르타고 주변)와 더불어 3대 프로콘술 속주였다. 동로마 제국. 말기, 코앞의 비타니아 속주보다도 오래버텨, 1390년, 제일 마지막 아나톨리아 영토인 필라델피아의 항복으로 소멸하였다. * '''[[갈라티아]] 속주(Provincia Galatia)''':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에 있으며 주도는 안키라(현 터키 [[앙카라]])이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로]]가 이 지역 [[교회]] 신자들에게 쓴 편지이며 갈라티아라는 말은 갈리아에서 나왔다. 즉 [[켈트족]]이 이주한 지역이라는 뜻인데 보통 켈트족 하면 [[프랑스]](특히 [[브르타뉴]])나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을 떠올리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켈트#s-2.4]] 문서 참조. 많은 로마 제국 지도에서 남쪽의 피시디아와 합병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 '''[[카파도키아]] 속주(Provincia Cappadocia)''': 공화정 시대까지 속국이었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해 자치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카파도키아의 아르켈라우스 왕은 [[로도스]] 섬으로 일시적으로 은퇴하여 명목상으로는 동방지역의 총책임자였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것처럼 보였던 [[티베리우스]]를 이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눈 밖에 났구나 여겨 물로 보았고(slighted) 그 대신 얼마 안 가 요절하게 되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는데,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피가 직접 섞인 이들에게 늘 밀려 플랜 B로나 여겨졌던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s-5|그들의 연이은 요절]]과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자질 부족으로 인한 자격상실]] 등으로 인해 결국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아우구스투스를 이어 제위에 오르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잊지 않고 있던 티베리우스는 황제 즉위 후 17/18년에 아르켈라우스를 로마 시로 소환해서 로마에 대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죄목으로 투옥시키고 나서 카파도키아를 정식 속주로 편입했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Cappadocia_(Roman_province)|Cappadocia (Roman province)]] 중, 'Cappadocia remained an important and trusted eastern client kingdom under Emperor Augustus' reign. Rome's policy towards Cappadocia changed, however, following Augustus' death in 14 AD and the reign of Emperor Tiberius. Years earlier, '''Tiberius had been slighted by Archelaus when the Cappadocian king showed favor to Gaius Caesar, one of Augustus' grandsons and chief heirs.''' While Tiberius was in retirement on the Greek island of Rhodes from 6 BC to 2 AD, though the nominal commander of the Eastern half of the Empire, in 1 BC '''Archelaus recognized Gaius Caesar, then a military commander subordinate to Tiberius, as Augustus' true representative.''' Though Gaius Caesar was Augustus' preferred successor, '''his death in 4 AD while on military campaign in Armenia forced Augustus to adopt Tiberius and name him as his successor.'''' 및 'Wanting direct access to Cappadocia's resources and seeking to reduce Archelaus, '''Tiberius summoned Archelaus to Rome in 17 AD.''' At the time, Archelaus had governed Cappadocia as Rome's client king for over fifty-years. When he arrived in Rome, Tiberius '''accused Archelaus of harboring revolutionary schemes and imprisoned him,''' where he died of natural causes soon thereafter. Sending his adoptive son Germanicus to oversee Rome's affairs in the East, Tiberius then '''annexed Cappadocia directly into the Empire by reducing the kingdom into a Roman province.''''] 여기에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https://en.wikipedia.org/wiki/Lesser_Armenia|소 아르메니아(Armenia Minor; Lesser Armenia)]]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터키 동부 내륙지방이며 배낭관광객들에겐 기암괴석과 [[스타워즈]] 촬영현장, 그리고 [[열기구]] 타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변방이나 다름없던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절벽이나 바위에 구멍의 뚫어 도시와 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데린쿠유]] 참조. 후대 4세기에는 유명한 [[https://en.wikipedia.org/wiki/Cappadocian_Fathers|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출신지로도 유명하다. 주도는 카이사레아(현 터키 카이세리). 파르티아나 사산조, 아르메니아와 마주하는 최전방이라 2개 군단이 상주하였으며 우수한 기병대로 유명했다. * '''[[콤마게네]] 속주(Provincia Commagene)'''[* 후에 시리아 속주에 흡수]: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산하로 제법 늦게 편입되었다. 서기 1세기 후반까지 콤마게네 왕국이 있었고 [[아르메니아 왕국]]과 함께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 있어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로 버텼다. 하지만 서기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점령되었다. 주도는 사모사타(현 터키 삼사트)이며 현재 이 도시는 터키의 수자원 무기화를 위한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기 때문에 근처에 재건되었다. * '''[[리키아]] 에트 [[팜필리아]] 속주(Provincia Lycia et Pamphylia)''': 뤼키아는 전설상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벨레로폰]]이 이곳의 왕을 지냈다고 하며 [[트로이 전쟁]] 때에는 [[트로이]] 편을 들었다 한다. 기나긴 [[페르시아]]의 점령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국 중 [[셀레우코스 왕조]]에 속하게 되었으며 기원전 89년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로 편입되었다. 또한 팜필리아는 ‘모든 백성’, ‘여러 족속’이란 뜻이 있으며 도리아의 3부족 중 하나인 팜필리(Pamphyli)에서 파생된 것으로 [[바다 민족]]이 도래하였을 때 팜필리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뤼키아와 많은 역사를 공유하였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뤼키아와 통합되었다. 이 통합 속주의 주도는 아탈리아(현 터키 안탈리아)이다. * '''[[킬리키아]] 속주(Provincia Cilicia)''':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부에 있으며 키프로스와 마주보고 있다. 로마제국 점령 전에는 [[이수스 전투]]가 발생된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이 지역을 비롯해 리키아, 팜필리아 등 아나톨리아 남부 해역은 예로부터 [[해적]]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폼페이우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물론 속주 점령은 덤으로 따라왔다. 주도는 [[타르수스]](현 터키 아다나)로, [[사도 바울로]]의 고향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에선 1100년대 후반, 마누엘 대제 사후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속국에서 벗어나며 완전히 소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