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양원 (문단 편집) == 일생 == [[대한민국]]의 [[개신교]] [[장로회]] [[목사]]. [[별명]] "사랑의 원자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손종일(孫宗一, 1871.1.17 ~ 1945.4.13) 및 김은수(1873.2.10 ~ 1936.5.26)의 3남 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손양원은 1908년 부친의 입신과 함께 7세에 입신하여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으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12세 때 칠원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보통학교 3학년(15세) 때 일이다. 조회 때 천왕이 사는 궁성 쪽을 향해 절하는 소위 '동방요배'라는 것을 하는데 손양원 목사는 이를 거절하다가 교장에게 불려 가게 되었고 신사 참배에 반대한 이유로 퇴학당하였으나 선교사 맹호은(孟皓恩, 맥크레이) 목사의 도움으로 다시 복교할 수 있었으며, 1917년 7월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8세 되던 해에 [[중동고등학교|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아버지가 3.1운동에 참가하여 옥에 갇혔기에 손양원 목사도 찍혔다. 그는 서울에 있는 동안 낮에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 만두를 팔았으나, 이를 계속할 수 없어서 고향에 내려와 잠시(약 3년) 고향에서 가족을 돌보면서 지내야 했다. 하지만 불타는 향학심을 누를 길이 없어, 그는 192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스카모(巣鴨)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 시기에 교회출석은 물론 노방전도도 열심히 하였으며 1923년 귀국하여 그해 10월 칠원읍 교회 집사로 피선되었다. 1926~1934년에 전도사로서 부산 감만동의 나환자 수용시설 상애원(相愛園)에서 일했다. 이곳에서 매견시(1865-1956, 梅見施, Mackenzie) 선교사와 인연을 맺었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http://www.aeyangwon.org/main/main.html|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기독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환자들 중 상태가 심한 환자들만 격리해놓은 방이 있었다. 간호사들조차 신문지를 깔고 들어가니 그런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환자 중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 라고 외치면서 간호사들 중 하나를 [[목침]]으로 때려 죽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맨발로 그 방에 들어가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손 목사는 상처를 '''직접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한센병이 [[전염병]]인지라 애양원에서 크게 걱정을 하며 수차례 검사를 시행했지만 다행히 손 목사에게는 발병하지 않았는데 이에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할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였다고 한다. 1940년에는 평양의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당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실명]] 위기까지 왔었다고 한다. 이 때 나온 기도 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에게 유명한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다는 이야기로 아내 정양순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왔다. 그가 수감되어 있을 때 [[일본 제국|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신앙을 바꿔보려고 했는데, [[불교]]관련 책을 강제로 읽고 감상문을 쓰게 하거나 일본인 [[스님]]을 불러서 그가 불교신자로 바뀌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와의 종교 담론을 하던 그 스님은 전도가 끝까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손 목사의 반론에 할말도 없어지자 결국 분노가 폭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 목사의 뺨을 때리고 만다. 그럼에도 손 목사는 오히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이쪽 뺨도 치십시오."하며 뺨을 내밀자 그 스님은 아예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바람에 감방 간수들이 끌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판본에 따라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손 목사가 저 말을 하며 뺨을 내밀자 '''오히려 무릎을 꿇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내 살아 생전에 [[미륵불]]께서 현신하신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다니.!"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목사]]가 되어서 다시 애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출소한 뒤 최초로 설교자로 참여한 예배에서는 설교를 시작하려다가, 그때까지도 버젓이 예배당에 놓여있던 가미다나(かみだな, 神棚)를 보고[* 일제 시대에는 기독교 탄압이 심했고, 그나마도 예배를 보기 전에 신토신단에 참배를 하지 않으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악습이 해방이 된 뒤에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격분하여 그 자리에서 바닥에 던져 [[개박살]]내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설교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8년 발생한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 씨와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좋게 보던 반란군 세력이 반란 당시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였다. 두 사람의 장례 예배 때 손 목사는 '''감사 기도를 올린''' 것이다. 감사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와 함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이후 손 목사는 실제로 반란군 인사 중 안재선이란 좌익학생[* 손양원 목사의 아들로서 새 삶을 살 때, 친부모에 대해 언급된 바가 없다. 사건 이전의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다. 본인도 본인 부모님도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계열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 다만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씨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목사를 보면 이때 안재선은 자신은 '''이 둘을 죽이지 않았고 단지 [[확인 사살]]만 한 것이라고''' 자신의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했는데 오히려 시민들은 '''한번 죽인 걸로도 모자라 죽은 사람에 또 총을 쏘아 두번 죽였냐?'''며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를 용서하고 안재선 씨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딸 손동희 권사의 회고록을 보면 두 아들의 유품이 전달됐을 때 하염없이 통곡했다고 한다.] [[린치|격분한 마을 사람들과 애양원 환자들에 의해 안재선 씨의 처형이 집행되려 할 때]], 손 목사는 [[설교]]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여고생이던 딸 손동희 씨에게 '빨리 가서 안재선 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말리고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부탁했는데, 당연히 손동희 씨는 자신의 친오빠들을 죽인 살인자를 살리는 것도 모자라 한 가족이 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처형장으로 가면서도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하고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안재선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오빠들을 살려내던가, 자살로 사죄하라"는 식의 원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를 용서하고 오빠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안재선 씨는 자신의 행동을 참회했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따랐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북한군이 해치지는 않을테니 손 목사에게 떠나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여수로 진격한 북한군에게 기독교 목사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북한군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을 때에도, 식사 시간 때마다 들어오는 [[주먹밥]] 중 가장 작은 것을 집어먹었고 그마저도 반으로 쪼개서 감방의 사람들 중 가장 굶주리고 있던 사람에게 "나는 본래 소식가라서 이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며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했다. 향년 49세. 안타깝게도 이때는 인천에서 한창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고 서울이 수복된 때였기에, 만약 이로부터 단 이틀만 더 버텼으면 그도 무사히 살아남았을 수도 있었다. 이때 북한군들이 총을 쏘던 순간, 젖먹던 힘으로 손에 묶인 밧줄을 기적적으로 풀고 정신없이 뛰어서 탈출하여 다행히 살아남은 김창수라는 이름의 생존자가 있었고 그는 세상에 손 목사가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을 알렸다. [[장례식]] 때 손양원 목사 장례의 상주를 맡은 안재선 씨가 가장 슬퍼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양원목사 장례식.jpg|width=100%]]}}}|| || {{{#fff '''손 목사의 장례식 모습. 상복을 입은 키큰 남자가 안재선 씨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03976685946.jpg|width=100%]]}}}|| || {{{#fff '''손 목사의 장례식이후 가족사진.'''}}} || 손 목사는 안재선 씨가 자신을 따라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데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을 참회하며 살았고, 1978년 12월 16일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신도로 사역 활동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손 목사의 아들들을 살해한 것을 참회했다. 그때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양동생 손동희에게 한 말은 '''천국에 가서 너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겠다'''였다. 그의 아들인 안경선 목사[* [[1960년]]생이다.]의 증언으로는 그가 신학교에 입학도 하고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며 생활했으나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그런 사람의 설교를 누가 들으려하겠냐는 자격지심에 목사가 되길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인 안경선 씨는 '''"신학교에 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달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사가 되었고, 현재도 손 목사의 유복자 막내아들인 손동길 씨를 작은아버지로 모시면서 함께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안경선 목사는 [[서울기독대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에서 목회를 하다가 아프리카 [[부룬디]]의 한센인 마을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의 한센인 목회를 양손자가 계승하게 된 것이다. 손양원의 묘지는 그가 봉사했던 애양원 근처에 있다. 두 아들이 묻힌 곳에 함께 묻혔다. 손양원이 총살당한 곳인 여수시 둔덕동에는 그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