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양원 (문단 편집) == 가족 및 은인 == 부모님: 손종일(1871) 장로, 김은수(1873) 집사 형제자매 3남 1녀: 손봉연(女, 1896), 본인(1902), 손문준(?), [[서부교회|손의원]](1909) 자녀 4남 3녀: 손동인(1925), 동신(1930), 동희(女, 1933), 동장(1936), 동림(女, 1940), 동연(女, 1947), 동길(1950). * 손종일 장로 "내 자손에게 무엇보다도 신앙을 전작 하겠다." 이는 손종일 장로의 자손 교양의 수훈이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이 아버지의 입신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민족자존과 국가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손양원 목사에게 나라사랑과 민족애로 나타나게 되었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입신과 함께 불타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고 활활 타오르는 그의 신앙은 가정에 새로운 삶의 지표를 세워놓았다. 손양원 목사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확고한 신앙 정신 아래서 신앙을 배우게 되었고 그 신앙이 훗날에 귀한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 부친 손종일 장로는 1919년에 엄주신, 박순익, 윤형규, 신영경 등과 함께 칠원만세운동(3월 23일, 4월 4일, 8일, 13일)의 준비부터 거사까지 이끌었다. 훗날 아들 손양원이 신사 참배를 반대하여 일본 경찰에 끌려갈 때, 손종일은 아들의 귀에 대고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누가복음 9장 26절) 및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0장 37절) 말씀을 들려주었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에게, 감옥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의 명령만을 붙들라는 것이었고, 변절할 상황이 생기면 순교하라는 말이었다. ||神社不參拜한 普校生三名退學 (漆原) 동아일보 1937.10.21 지난달 22일 생업보국일에 칠원에서는 관민일체로 신사참배를 하였음에 불구하고 유독 기독교 신자들만이 불참배를 하였기 때문에 경찰당국은 교회 대표로 손종일(孫宗一), 엄주신(嚴柱信) 양씨를 불러 경고를 하였는데 지난 15일에는 관민, 학생 전부가 신사참배를 하는데 그중 기독교 신자의 자제 3명이 불참배한 것이 문제되었다. 보통학교에서는 즉시 이 사실을 도 학무과에 보고하는 동시에 이들 3명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고 앞으로도 일반 생도들의 신사참배의 열성을 고취하기로 되었다.|| * 첫 아들 손동인은 사망하기 전에 찬송가 493번 [[하늘 가는 밝은 길이]] 1절을 불렀다. >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 손양원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만남 손양원 목사와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은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경남성경학교에서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은 손양원 목사가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주기철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으며 "신사참배 문제 이후로 설교할 때에 우상 죄를 공격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으며 "가장 잘 죽은 사람 누구인가? 주를 높이다가 죽은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시록 14:13),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가 가장 잘 죽은 사람일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손양원 목사는 옥중에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부모나 자녀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도 더 슬퍼서 30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애곡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손양원 목사에게 항상 귀감이 되었으며 손양원 목사는 주기철 목사를 존경하여 그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은혜의 사람에게 믿음의 세례를 받다. (맹호은, Frederick John Macrae) 맥크레이 선교사는 1884년 5월 14일 스코틀랜드 콧펜(Cockpen)에서 태어났으며, 1891년 아버지 존 맥크레이(John MacRae) 목사가 호주 멜버른의 투락(Toorak)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아들 맥크레이도 호주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선교대회에 참가했던 맥크레이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 11월 2일 호주 장로교 한국 선교사로 첫 발을 디뎠다. 한국어 선생에게 '은혜의 사람'이라는 뜻의 '맹호은(한국명: 孟皓恩)'이라는 이름을 받고 나서 30여년의 한국 선교 기간 동안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한국에 도착한 지 1년 후, 그는 커럴 의사와 함께 진주, 거창, 함양, 함안, 웅천에 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거의 300km에 이르는 장거리 전도 순회여행을 하였다. 그는 코넷(cornet)을 불며 2년여 동안 40~50개의 장터를 돌앋니며 전도를 했다. 또한 그가 타고 다녔던 오토바이는 마산 지역 최초의 것이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코넷을 불며 선교하는 큰 키의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 화제의 대상이었다. 아담슨(Rev. Andrew Adamson, 한국명: 손안로, 한국사역 1894~1914) 선교사에 이어 마산포교회(현 문창교회)를 발전시켰다. 또한 손양원 목사를 배출한 함안 구성 교회에서 마산지방 남녀사경회를 1918년 개최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으며 손양원 목사의 소년 시절에는 직접 세례를 맡았으며 손양원 목사가 칠원보통학교 시절 동방요배 거부로 퇴학을 당하자 복교할 수 있도록 힘쓰기도 했다. 1920년에는 창신 학교 교장(3대)으로 취임하여 창신 학교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마산 최초의 의신 유치원, 불우한 소녀들을 위한 마산여자야학교 등을 설립하여 마산 지역의 교육 및 선교의 기초를 닦았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후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코틀랜드에서 1973년 1월 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