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책 (문단 편집) === [[유요#s-1|유요]]를 격파하다 === 194년, 양주 자사 유요가 단양에서 오경과 손분을 쫓아내며 원술과 전쟁을 시작한다. 유요는 [[번능]]과 [[우미]]를 횡강진에 주둔하게 하고, [[장영]]은 당리구에 주둔시켜 원술에 맞서도록 했다. 원술은 [[혜구]]를 양주 자사로 삼고, 오경을 독군 중랑장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장영 등을 치게 했으나, 1년이 넘게 이기지 못했고 이에 손책이 원술에게 참전을 요청했다.[* 연의에서는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담보로 하여 군사를 받았고 [[황개]] 등 옛 가신들이 합류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원술은 그가 태수직을 안 줘서 손책이 품은 원한을 기억했지만, 유요가 곡아를 점거하고 있고, 회계에 왕랑이 있어서, 손책이 쉽게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이를 허락했다. 단양군 태수 오경을 도우러 양주 방향으로 진출한 손책은 그야말로 양민 학살이 뭔지 확실히 보여주게 된다. 원술이 표를 올려 손책은 절충 교위와 행(行) 진구 장군 임명되어 출병한다. 처음 병사는 천여 명에 기병 수십 필이었으나 따르기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라 역양(歷陽)에 도착할 즈음에는 5~6천명을 얻었다. 손책은 역양에서 병사를 인솔하여 온 주유와 합류했고 손책의 모친 무열황후가 먼저 곡아에서 역양으로 이사와 있었으니, 손책이 다시 무열황후를 부릉(阜陵)으로 옮긴다. 손책군은 장강을 건너 단양군을 치는데 손책은 군사적인 재능이 있어 유요군을 격파한다. 태사자전에 따르면 [[태사자]]와의 처절한 [[일기토]]는 정사에도 기록으로 남아서 그가 싸움꾼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서 1차로 말 추격전, 2차로 칼&창싸움, 3차로 주먹다짐까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4차로 공성전 당시 싸움 중에 뺏었던 태사자의 수극과 손책의 투구를 내걸어 욕배틀을 하기도 한다.] 이 싸움은 양측의 군사들이 몰려나오는 바람에 무승부가 되었다. 강표전에 따르면 이듬해인 195년, 손책이 유요의 우저산에 있는 진영을 공격하여, 창고의 양곡과 군수품을 모두 얻었다. 말릉성(훗날 건업)을 지키던 팽성상 [[설례#s-2|설례]]와 하비상 [[착융]][* [[조조]]의 공격으로 치소인 팽성국과 하비국을 떠났다.]은 유요를 맹주로 삼고 있었는데 손책이 착융을 선공격하여 5백 여명을 죽이니 착융은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선 손책은 장강을 건너 설례를 공격하자, 설례는 갑자기 달아나서는 번능, 우미 등과 함께 우저의 진영을 습격해 탈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책이 돌아가 번능 등을 공격하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았다.[* 연의에서의 허구로 [[번능]]은 손책의 고함 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 [[우미#s-1.1|우미]]는 손책이 옆구리에 끼우고 끌고 오다가 [[질식]]해 죽었다.] 다시 내려와 착융을 공격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허벅지에 상처를 입어서 말에 탈 수 없게 되자, 직접 수레를 몰고 우저영으로 돌아갔다. 어떤 배신자가 착융에게 "손랑이 화살에 맞아 이미 죽었다."고 알리자 기뻐한 착융이 장수 우자(于慈)를 보내어 손책을 향해 가게 했다. 그러나 손책은 우자를 도발하여 배후에 매복시킨 복병으로 격파하여 1천 여명을 베었다. 이후 손책이 착융의 진영 아래로 가서 주변인들에게 "손랑이 마침내 어찌되었다고 하더냐!"고 외치게 하자 놀란 적의 병사들은 두려워 밤중에 달아났다. 착융은 손책이 아직 살아있음을 듣고는 다시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면서 수선하며 [[우주방어]] 모드로 들어가 그가 있는 곳은 지키는 데 성공하지만 그 틈에 손책은 유요의 본군을 공격한다. 손책군은 별장(別將)을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서 호숙(湖孰)과 강승(江乘)을 공격해 모두 항복시켰다. 손책은 용모가 빼어나고 사교성이 좋아서 민심을 얻었고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의 태수들도 모두 성곽을 부수고 달아났다. 유요가 예장으로 도망칠 때 [[태사자]]는 저항하나 결국 손책에게 사로잡혀 투항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백성들은 모두 손책을 손랑(孫郞)이라 불렀고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는다. 손책은 장수 진보(陳寶)를 보내 부릉으로 가서 모친 무열황후와 동생들을 데려오게 하고 은혜를 베푸는 영을 내리자 사람들이 모여 병사 2만여 명과 말 1천 필을 얻었다. 사실 유요는 원래 조정이 공식 임명한 관리였으나, 조조와 예주의 패권을 두고 싸우다 패배한 원술이 주도인 수춘을 점령하고 회남에 일대 세력을 구축하자 그걸 두려워해 곡아를 임시 주도로 삼고 단양군 태수 오경을 쫓아내는 등 나름대로 주권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 때 유요의 장수인 번능, 장영, 우미 등이 원술을 막았는데, 원술군은 이들을 1년이 지나도록 격파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힘이 좀 빠졌을 즈음 손책이 들이친 상황이었다. 즉, 손책의 첫 스타트는 1년 동안 원술군 상대하느라 진이 빠진 양주군을 학살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당시 손책군보다 유요의 군대 훨씬 대규모였으며 원술군과의 1년여의 대치로 훈련된 군사라고 봐야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