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솔로몬 (문단 편집) == 평가 == 여러모로 '''공과 과가 명확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만든 결과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버지 다윗이 물려준 탄탄한 국가를 나름 잘 유지하다가 끝에 가서 사치와 향락으로 망쳐버린 원흉. 즉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사실상 '''"속빈 강정"'''이였던 셈이다.[* 이는 먼 훗날 전세계 최강의 절대군주로 평가받던 [[건륭제]]에 대한 평가와 유사하다. 건륭제 역시 측근비리를 눈감아주고 자신 역시 생일에 금불상 3만개를 선물받는 등 재산 모으기에 골몰하며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폐단들은 고스란히 후대에 커다란 재앙이 된다.] 그는 분명히 명군의 자질이 있었고 즉위 이후에도 나라를 성실히 이끌어갔다. 그의 통치기는 이스라엘의 절정기였으며 은이 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부강했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도 위상이 높아져서 이집트 제 21왕조와 결혼 동맹을 맺고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입지를 굳혀나갔다. 또한 국방과 행정에도 신경을 써서 군사력을 보강하고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전제 왕권을 구축해나갔다. 성경만 봐서는 이해가 안될 수 있지만 역사책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군사력 보강과 지방관 파견은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해가 안된다면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진시황]]이 제일 먼저 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문제는 그가 '''[[타락|이렇게 만든 결과물을 가지고 축첩질을 일삼으며 놀아재꼈다는 것.]]''' 사실 그의 치세는 겉으로는 부강해 보였으나 속은 썩어가는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었다. 앞서 언급된 신명기 17:16-17은 너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두개의 나라로 갈라질 것이나 다만 너의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 네가 아닌 너의 아들 대에 갈라지리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솔로몬이 단독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신과 함께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인 것.[* 한 국가가 결정한 정책이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비슷하게 청나라는 [[강희제]] 때부터 다져온 기반을 바탕으로 [[건륭제]] 때 절정을 누렸으며, 프랑스의 절대 군주 [[루이 14세]] 역시 [[앙리 4세|할아버지]] 때 부터 닦아온 기반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위의 두 사람은 본인들의 물욕과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는데 일조했다.] 즉, 다윗 대에 다져진 것을 바탕으로 솔로몬 대에 전성기를 누린 것이 맞다. 물론 솔로몬이 못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고 명군의 자질은 분명히 드러났으나 아버지 다윗에 비하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더욱히 그가 막대한 조공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축첩질에 골몰하면서 결과적으로 신을 섬기는 선민[* 선택된 백성, 즉 신의 선택을 받은 성도라는 의미. 이스라엘은 이전부터 선민이라는 것으로 세상과 자신들을 구분지으며 세상과는 다른 존재임을 의식하고 있었다.]으로서의 본질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고 예전의 보여왔던 지혜와 명군으로서의 자질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열왕기]]의 기록의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는 견해 차가 있을 수 있다.''' 왕실 역사가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역대기]]와는 달리 열왕기에는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사관은 아무래도 왕실 역사가들에 비해서는 왕국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다. 가령 역시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사무엘서]]에서는 왕정 자체가 신정이 아니기에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솔로몬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열왕기는 비판적인 관점을 우선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궁궐을 건축하고 사치와 호화를 누렸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왕실이 정당한 부와 영광을 누리고 드러내는 것을 공연히 문제삼는다고 항변할 수 있다. 사실 사치가 나쁜건 맞지만 전근대에는 사치가 곧 자기과시(=나는 이렇게 사치할 정도로 부유하다)인 경우도 많았고 이런 자기과시는 자신의 권위와도 연관되기에 군주들 중에서는 사치하는 왕도 종종 나오곤 했다.[* 현대 아랍권 군주들도 종종 이런 행동을 보이고는 한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가 대표적. 사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아랍권 국가들의 주류 민족이 약탈과 사냥으로 먹고살던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자기과시, 군사문화 등을 통해 남성성, 우월성을 강조하는 풍토가 강하다.] 외국 여인들을 첩실로 삼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이는 외교의 일환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왕족과 귀족의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가장 확실한 동맹의 방법이자 효율적인 외교 전략이다. 순혈주의적인 예언자 전통의 관점에서는 문제이겠지만,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불가피한 외교적 선택이다.[* 특히 호족 중심의 연맹왕국이나 유목 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정주 민족과의 동맹을 통해 안정적으로 물자를 공급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이스라엘과 비슷한 유목국가인 청나라나 오스만제국도 안정적인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몽골(청-청의 황제는 몽골 귀족과의 통혼을 통해 몽골 카간자리도 대대손손 해먹었다.), 아랍인(오스만) 등 다 다른 민족과의 통혼은 흔한 일이였다.] 신이 사랑한 왕 다윗도 암몬 왕의 딸이나 헷 사람의 아내 등 외국의 여인들과 결혼하였음은 마찬가지인데, 솔로몬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부당하다.[* 다윗 자신도 증조어머니인 룻은 모압인이다.] 하지만 혼인동맹이 확실한 외교적인 안전장치가 되지 않는다는 사례는 역사상 무수히 많고 솔로몬 또한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한것이 이집트의 왕조교체로 인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이집트의 반이스라엘 정책을 막지 못해 이집트가 여로보암의 망명을 받아주고 르호보암 치세때 예루살렘을 침공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에 사례로 나온 [[청나라]]나 [[오스만 제국]]의 경우만 봐도 답이 나오는데 청나라를 세운 건주여진의 경우 자신들의 풍습을 한족들에게 강요하고 기록 말살까지 자행했음에도 결국은 한족에 대부분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이슬람을 받아들인 시점부터 아랍인과 서서히 동화되었다. 반면 같은 유목제국임에도 다른 피지배민족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던 몽골인들은 비록 분열되긴 했지만 자신의 언어와 풍습을 현대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결국 당장의 국가 발전에는 혼인동맹이나 융화정책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민족의 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손해가 맞다. 즉 국가가 아닌 민족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경의 관점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셈이다. 특히나 이 시대에는 민족간 정체성 차이가 지금만큼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다고 비판을 받지만, 솔로몬이 신앙을 버렸다기 보다는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 배타주의적 예언자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언자들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관용하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장려하는 것'과 진배 없고, 나아가 그 스스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도 진배 없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교류하는 중심지인 수도의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하고 존중하는 정책을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신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왕이 우상에 절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옆에서 부축하는 일을 예언자 엘리사가 허용했던 취지를 고려하여 솔로몬의 행적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는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내부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설명인데, 다윗 왕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 지파의 연계성은 상당히 느슨한 편이라, 각 지파간의 내전도 몇번 일어났다.[* 판관기에서 이 지파간의 내전에 대해 나오는데 한번 일어나면 수만명씩 죽어나갔고 특히 베냐민 지파는 나머지 11지파에게 다굴 당해 전멸 직전까지 갔다.] 이 상황에서 왕정 이전시기에는 각 지파를 연결해 주는것이 종교지도자인 (사사/판관)이었듯이, 유대교는 각 지파의 연계성을 강화시켜주는 장치였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시대에는 [[종교]]가 그 국가나 민족을 엮어주는 중요한 정체성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로서는 관료제가 있던 것도 아니고 왕권을 뒷받침해줄 충분한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집트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엄청나게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집단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신의 뜻'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다. 구약에서 내내 까이는 주제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지 신 자체를 안 믿는 것이 아니다. 즉 야훼를 안 믿더라도 결국은 다른 신을 믿게 되어 있지 신 자체를 안 믿는건 없었다는 것.] 분열된 북 이스라엘 왕국이 초창기에 유다왕국과의 연계를 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것중 하나가 제사지내는 곳의 위치변경이었던 점에서도 이런 부분이 드러난다. 그런데 타종교를 받아들이는 정책은 이런 연계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지,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고려해도 솔로몬이 도를 많이 넘은 것은 맞다. 교류나 외교적 차원에서의 혼인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지나치게 방탕했다. 교류를 해도 지킬 건 지켜야 되는데, 왕이 앞장서서 놀아재끼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 결국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신생왕조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절단이 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로보암의 북 이스라엘이 210년, 다윗 혈통의 남유다가 350년 정도를 유지했다는 점. 비록 성경에 묘사된 다윗-솔로몬 시절만큼 세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모압, 암몬, 에돔 등을 위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긴 했다.--부잣집은 망해도 3년은 간다더라-- 정리하자면 여러모로 후대의 군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명군의 모습과 암군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입체적인 인물이기 때문. 사실 군주의 자리가 여러모로 초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 전세계 어느나라를 봐도 군주가 초심을 잃고 타락한 사례는 많고 대놓고 십전노인, 신선이라고 자처한 [[건륭제]]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 솔로몬 정도면 그나마 얌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나마 이쪽은 다음 황제인 [[가경제]]와 [[도광제]]가 방만해진 재정을 바로잡고 이후에도 [[이홍장]]과 [[좌종당]] 같은 유능한 관료, 군인들이 등장해서 혼란을 수습하고 왕조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성공했다.--물론 [[서태후]]가 등장하면서 헬게이트 크리(...)--] 그러나 솔로몬을 통해 성경이 후대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바로 겸양과 자아성찰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쪽에 비견되는 자세가 바로 백성들이 여유있는 삶을 누리도록 한 앙리 4세나 하늘을 섬기는 신하를 자처했던 [[강희제]], 워커홀릭 수준으로 관리들을 잡아대고 관리, 신사층이 비리를 저질러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경계하며 근면하게 제국을 통치한 [[옹정제]]의 통치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재위 초반에는 지혜를 구하며 근면하게 왕국을 통치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 자신의 욕심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하면서부터 안에서부터 서서히 곪아갔던 것은 지도자 한 사람의 교만과 타락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나라를 크고 아름답게 만든 군주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내치와 경제력을 안정시킨 군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시각과도 일치한다. 즉 솔로몬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암군|놀아재꼈다]]"'''라는 측면보다는 나라를 크고 넓게 만들 능력은 있었으나 발전한 왕국을 다스릴 장기적으로 보는 안목이 부족해 현실에 안주한 것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