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도자 (문단 편집) === 역사 ===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은 멀리 박해시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적잖은 남녀 신자들이 [[야훼|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광야와 산기슭, 기둥 꼭대기에서 은둔생활을 한 데서 수도생활의 시초를 찾을 수 있다[* 주로 [[시리아]]의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일을 했는데, 특히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기둥 위로 올라가 다른 사람들이 주는 음식만 받아 먹으며 기도만 하던 이른바 '주상성자'들이 유명했다. 이 주상성자들이 남긴 유물은 동로마 황제들이 수집하는데 열을 올리기도 했다.]. 수도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오 아빠스]]'''는, [[이집트]] 사막에서 은거하던 수도승이었다. 혼자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5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자기와 뜻이 맞은 사람 여럿을 모아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이들 중 유명한 이가 바로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이며, 각각 [[베네딕토회]]와 [[프란치스코회]]를 창시하였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의 탁발 [[수도회]]가 생겨나기 전에는, 수도원이라고 하면 [[베네딕토회]]의 수도원 같은 자치 구역에서 정주 생활을 하면서 개별 수도원장은 거의 [[영주(중세)|영주]]나 다름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수사들이 직접 필요한 것들을 자급자족하도록 하는 청빈한 삶을 장려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수도회가 대다수를 이루었던 [[중세]]시대 [[유럽]]의 수사들은 매일 아침 일찍 밭일하러 나갔다가, 저녁 때서야 퇴근하고는 그 후에도 [[성경]]을 필사하거나[*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만 해도 [[중세]] [[유럽]]에서는 [[책]]을 가지려면 [[노가다|원서를 직접 필사해서 제본하는 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책값이 너무 비싸서 [[신부(성직자)|신부]]나 수사들이 쓸 [[성경]]도 자기들이 알아서 필사해서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어]]로 된 성경이나 여러 교양 서적들을 번역하는 작업에 매달리는 매우 피곤한 삶을 살았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수많은 고전 문학 작품들과 [[철학]] 사상 및 과학이론들은 전부 자치 수도회의 수사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물론 정주 생활하는 수도회의 존재가 이런 긍정적인 영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따금씩 [[창부정치]]니 [[아비뇽 유수]]니 하면서 [[그리스도교]]계가 개판이 되는 상황이 되어서 수사들이 타락에 빠지면, [[장미의 이름]]에서 나오는 수도원같은 개막장스럽게 운영되는 수도원이 이런 수도회에서 나타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탁발 수도회는 외딴 곳에 정주하지 않고 [[도시]]에 가서 순회 설교와 [[미사]]를 드리고 헌금을 조금씩 받아 생활했다. 그래서 현대에도 [[베네딕토회]]는 수도원 부지 자체가 넓고 여러가지 자급자족 시설이 많으며 수도원의 분원이 별로 없지만,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는 자체 수도원 부지는 딱 필요한 만큼만 차지하며, 분원을 각지에 설치하는 형태이다. 반면 동방교회에서는 탁발수도회라는 개념이 없다. 12세기에 탁발 수도회가 많아졌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2개만 정식 수도회로 인정하였고, 후임 [[호노리오 3세]]가 [[가르멜회]]를, [[알렉산데르 4세]]가 [[아우구스티노회]]를 마지막으로 인정[* [[아우구스티노회]] 또한 [[베네딕토회]]와 마찬가지로 창립년도는 서기 400년으로 오래되었지만, 규칙서만 가지고 여기저기 흩어져 서로 독립된 수도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교황의 소집령과 통합명령으로 합쳐지게 되었다.]하여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5대 탁발수도회가 되었으며 이들 수도회는 수도회 명칭 앞에 'Ordo'라는 명칭 및[* ex: 베네딕토회=Ordo Sancti Benedicti=OSB/아우구스티노회=OSA/도미니코회=OP] 교황청 직속으로서 각 교구 주교들의 교도권에 구속되지 않는 특례를 받는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순회설교나 [[미사]]를 드려야 하는데 각 지역의 주교의 지침에 따라 자체적인 수도회 방침과 영성을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바꿀 순 없었고, 현재도 각 관구와 지부가 전세계에 퍼져있다 보니…] 탁발수도회 중 [[프란치스코회]]는 다시 도시에서 사는 공동체([[http://www.ofm.or.kr/|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O.F.M]])와 산속에서 좀 더 은수적으로 사는 공동체([[http://www.ofmconv.or.kr/|꼰벤뚜알 작은형제회;O.F.M Conventualis]]), 도시에서 엄격한 청빈을 추구하는 공동체([[http://www.capuchin.or.kr/|카푸친 작은형제회;O.F.M Capuchini]])로 나뉘었다. [[베네딕토회]]는 통일된 하나의 수도회라기보단, 베네딕토 규칙서를 지키는 수도회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이 강하며, 각 수도원마다 서로 크게 간섭하거나 종속되지않는다. 이는 초창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도 비슷했다가 이젠 통합되어 중앙집권화된 것과는 다르게, 베네딕토회는 총 연합회를 두었을 뿐 아직까진 각 수도원마다 독자운영[* 연합회에조차 가입되어 있지 않은 베네딕토회도 있다!] 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중세의 수도자들이 로마 고전과 사서 등을 필사를 통해 많이 남겼기 때문에, [[고대 로마]]의 문학, 역사 등이 끊기지 않고 보존된 것에 이들의 역할이 크다. 또한 유물 등 문화재를 보존하고, 농법이나 건축술, 심지어 [[맥주]] 공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술들을 계승/발전시켜 낸 공로가 있다. 소식하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중세 유럽 수도원의 한끼 식사량은 900kcal 정도로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검소한 식사'라고 기록한 이유는 중세 중기까지만 해도 귀족들의 연회라는 것은 모두가 더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배터지게 먹고 마시다가 쓰러지는 것이었기 때문[* 이는 중세 이전의 로마 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로마 귀족들은 연회를 여는 장소에 아예 구토실이라는 별개의 장소를 마련해 놓고 음식을 잔뜩 먹어 더 이상 못 먹을 지경이 되면 구토실에 들어가서 몽땅 토해놓고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또 배터지게 먹는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로마 귀족들이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었던 것도 그렇게 하면 위장이 늘어나 평소보다 음식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해 [[예수회]]가 창설되어 [[종교개혁]]으로 피폐해진 가톨릭을 영적으로 복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 그리스도교 최초의 선교를 하게 된다.[* [[예수회]] 또한 위 탁발수도회와 같은 [[교황청]] 직속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