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도회 (문단 편집) == [[가톨릭]] ==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청]] 혹은 [[교구]]의 허가를 받아 수도회를 결성할 수 있다. 다음의 수도회는 현재까지 국내에 진출한 외방수도회들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직된 방인수도회들만을 쓴 것이고, 국내에 아직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들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정말 많다. '종교재판을 받는 여성들은 수녀원에 수감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남성 간수가 지키는 일반 감옥에 여성 재소자를 수감할 경우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당할 위험성이 있어서 그랬지만 수녀원이 아니라 군사감옥에 수감되었던 [[잔 다르크]] 성녀의 경우처럼,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중세]]~근세의 [[서유럽]]에서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강력한 고부가가치 산업기지의 역할도 맡았다. 수도원이란 자급자족을 지향하기 마련이며, [[수도자]]들은 기도뿐 아니라 노동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농토나 과수원, 가축에서 심지어 방앗간이나 양어장, 수공업 공방까지 자급자족이 가능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업 기술을 축적시켜 왔다. 또한 [[문맹]]자가 대부분이던 중세에 대다수의 수도자들은 문자 해독이 가능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보면 '글을 읽을 줄 몰라서 기도문을 외우고 돌아다니는 탁발수도승'을 "[[돌팔이]] 가짜 수도승이나 다름없다"고 비웃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사회에서도 "[[사제]]나 [[수도자]]라면 당연히 읽고 쓰기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수도자|수사]]들이 [[성경]]이나 [[고대 그리스]] 시기의 서적들을 직접 필사하거나 번역하는 작업을 했고, 일부 사제 서품을 받은 수도사제들이나 기타 학식이 풍부했던 몇몇 수녀들은 아예 [[기독교]] [[신학|신학자]]나 [[과학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힐데가르트 폰 빙엔]]가 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서유럽]] 문명권 전역이 파편화되면서 많은 지역에서 여러 가지 기술과 지식들이 실전되어가던 상황 속에서도 수도원에서는 문서를 통해 서로마의 지식과 기술을 보존하고 해독할 수 있었다. 또한 [[중세]]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부분의 수도원들은 도적 등의 약탈을 막기 위해 요새화되어 있었고,[* 물론 [[서유럽]]의 [[기독교]]화 이후에는, 수도원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것은 막대한 사회적 부담을 짊어지게 되는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13세기 경에 [[그리스]]의 [[수도자|수도사]] 공동체인 [[아토스|아토스 산]]의 수도원들이 [[라틴 제국]] 군대에게 약탈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16세기 초에 [[로마]] 시내의 교회와 수도원들이 대거 약탈당한 [[사코 디 로마]] 사건이 일어나는 등, 이것도 무조건 금기시된 건 아니다.] 폐쇄적인 수도원의 환경 속에서 인원 유출도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수도자]]라는 형태로 젊은 인력 역시 꾸준히 유입되었기에 [[치즈]]나 [[햄]], [[포도주]], [[잼(음식)|잼]] 만드는 법, [[레이스]] 짜는 법, [[약초]]를 이용한 [[약학]], 보건위생, 의술 등 당대 기준으로는 첨단, 고급 기술을 안정적으로 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기반을 바탕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근세]] 말~[[근대]] 초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수도원들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종의 산학 복합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에 더해 [[결혼]]과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는 [[수도자]]들의 특성상, 잘못하면 재산과 기술 기반이 후손들에게 분할되어 규모가 축소되고 세력을 잃거나 기술이 유출되기 쉬운, 또는 후계자가 없어 맥이 끊어지는 경우도 있는 세속의 사업체와는 달리, 수도원은 재산이든 기술이든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유입은 쉽고 유출은 어렵다는 강력한 장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반에 힘입어 근세 무렵까지만 해도 사치스러운 의복의 상징 중 하나가 '''수도원에서 짠 [[레이스]]로 장식된 옷'''[* 심지어 '''18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스칼렛이 레트와 결혼한 뒤에 부리는 사치 중 하나로 묘사되는 게 "수녀원에서 짠 속옷들"을 잔뜩 사들였다는 언급이다.]이었을 정도로 강력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산업화로 인해 고부가가치 산업기지로써의 위상은 거의 사라진 현대에도 장기간에 걸친 노하우가 축적된 식품등 경공업 생산품, 특히 공장제 대량생산에 비해 수공업 생산이 장점을 가진 영역에서는 품질이 훌륭하다는 평판을 얻는 경우가 많다. [[숙청]]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죽이기는 여러모로 곤란하지만 아무튼 놔두기도 어려운 자들을 독신서원을 시킨 후에 수도원에 유폐시키는 것으로 타협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철마다 [[잼(음식)|잼]]이나 [[햄]], [[소시지]], [[치즈]] 등의 저장식품을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비신자라도 인터넷으로 쉽게 구매 가능하게 된 곳도 많다. 대체로 가격은 세속 생산품보다 조금 비싸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 품질이 좋다. [[포도주]]나 [[맥주]], 리큐르 등의 양조나 [[잼(음식)|잼]], [[햄]], [[소시지]]나 [[치즈]] 등 유제품과 같은 식량 가공업은, 현대 기준으로는 [[경공업]]이다. 하지만 수도원의 전성기이던 [[중세]] 기준으로는 고급 기술이었기에, 중세로부터 축적되어 온 기술적 노하우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가격이 조금 비싸다는 것 역시, 공장제 대량생산에 비하면 비쌀 수밖에 없지만, 장인에 의한 수제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비싼 것은 아니다. 일단 수도원 자체가 이윤 추구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한 사기업과는 달리, 손해만 보지 않고 수도원 운영 경비 정도만 얻을 수 있으면 효율과 이익보다는 품질을 우선시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수제품으로써는 품질 대비 가격이 꽤 좋은 편이다. [[동아시아]]에선 큰 수도원이 많지 않다. [[대구광역시]] 근처 [[칠곡군]] [[왜관읍]]에 북한에서 월남한 [[베네딕토회]] 수도원([[천주교 덕원자치수도원구]])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북한]]에 있을 때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최대 규모 수도원은 [[홍콩]] 란터우 섬([[홍콩 국제공항]] 소재지)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이다. 원래 [[베이징]]에 있다가 1949년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자 월남했다. 참고로 [[한국 가톨릭]]은 [[유럽]]권 국가들에 비하여, 수도회보다는 [[교구]]의 권한이 굉장히 강한 편이며, 수도원들은 인근 교구 아래에서 활동한다.[* [[예수회]]와 탁발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가르멜회]], [[프란치스코회]] 등은 [[교황청]] 직속이기에 활동[[교구]] [[주교]]의 교도권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예를 들어 위 수도회 소속 [[수도자]]가 해당 교구내에서 사고를 쳤을 경우, 이 수도자에 대한 징계권은 오직 [[교황]]과 수도회 장상에게 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들은 물론, 종류를 불문하고 가톨릭 단체의 활동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해당 교구의 주교이기 때문에 교구장은 말 한마디로 위에 적힌 수도회들을 자신의 교구에서 쫓아내 버릴 수도, 해당 수도회가 사목하던 시설, 사도직을 교구 관할로 접수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수도회 소속의 신학생이라도 결국은 활동 교구에서 서품을 받아야 한다.] 또한 교구 신학생들은 주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오는 반면, 수도회 신학생들은 어느 정도 사회 경험을 겪은 20대 후반의 총각들이 많이 오는 편. 반면 [[유럽]]권에서는 수도사제들이 교구사제들보다 조금 더 엘리트로 취급받는 풍조가 있다.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이다. 1888년 [[프랑스인]] 수녀 2명과 [[중국인]] 수련수녀 2명이 입국하여 수녀원을 세웠다. 한국 가톨릭 최초의 남자 수도회는 [[베네딕토회]]로, 1909년 [[독일인]] 수사신부들과 평수사들이 입국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이후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한국 땅에서 수도회가 세워지기도 하고, [[한국인]]에 의해 한국 땅에서 수도회가 세워지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베네딕도회]], [[카르투시오회]], 트라피스트회 등의 수도회는 남자를 수도승, 여자를 수녀승이라 부른다. 이외의 탁발 수도회의 경우는 그냥 수도사, 수녀라 부른다 [[가톨릭]] 수도회는 워낙 수가 많아, 남자수도회(수사회)와 여자수도회(수녀회)를 나누어 나열한다. 더 자세한 현황은 ebook으로 된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862|한국천주교회 통계 2020]]을 참고한다. (매년 혹은 격년으로 새로운 통계로 갱신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