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하르토 (문단 편집) === 경제발전과 부정부패 === 집권 이후 수하르토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경제발전에 집중하게 된다. 인도네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다섯 번째 산유국이었고[*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석유생산이 파크를 찍었던데다가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극복한 이후에 인도네시아의 경제가 다시 성장세에 접어들면서 석유소비가 급속히 늘어나는 바람에 석유수입국으로 전락했고, 덕택에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잠시 OPEC를 탈퇴했다.], 서방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자원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수하르토는 서방 세계의 투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고, 석유와 가스 산업으로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특히 오일쇼크는 수하르토에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었다. 1972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90달러 아래에 불과했던것이 1982년에 583달러까지 도달했고, 이 시기부터 도시 중산층들이 성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한편 그는 전체 국민 중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인도네시아의 성격을 고려해 농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고, [[수카르노]] 정권에서 식량 수입국이었던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정권 때에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식량 수출국이 되었다. 비록 1980년대 초중반에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경제가 잠시 침체되기도 했지만 저가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공업 및 제조업 육성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재빨리 위기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는 다시금 성장가도를 달렸고 1995년에 1인당 GDP 1000달러대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외자 유치를 목적으로 단행한 금융규제 완화로 인해 기업들의 채무가 급속히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고, 당장은 큰 성장을 누릴 수 있었지만 경제의 건전성을 크게 해치며 외부 위기에 취약해진 탓에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인도네시아가 말려들어가고 수하르토가 하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수하르토의 주도 하에 이뤄진 경제 발전은 그가 독재자란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다만 이 경제발전은 버클리 마피아(Berkeley Mafia)라고 불리는, 미국식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들의 협조를 받은 것이긴 하다.] 이로 인해 지금도 상당수 인도네시아인들이 수하르토 시절을 추억보정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 성과란 것도 갑론을박이 있긴 하나, 아예 성과가 없는건 아니어서 1966년에는 660%에 달하던 인도네시아의 인플레이션 비율이 1969년에는 19%대, 1972년에는 9%대로 떨여졌고, 1970년대 중순~80년대 초와 19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의 고도성장기때에는 실제로 소득수준이 크게 올랐기도 했다. 그리고 1967년에 54달러도 안 됐던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가 1997년에는 약 1,054달러로 20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480.4달러에서 1,975.6달러로 증가하여 30년 동안 약 4배 정도 증가한 셈이다.], 이 시기에 빈민율은 56%에서 12%로 감소했고, [[평균수명]]도 47세에서 67세로 증가했으며, 영유아 사망률도 이전의 60% 이상이나 줄었다. 그리고 수하르토는 9년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초등학생들의 등록금을 면제하며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쉽게 하도록 했고, 그 결과 1983년 기준으로 초등학교 취학률은 90%에 도달하여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의 교육 격차는 거의 없어졌으며, 1984년에는 쌀을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1986년 7월 21일에 수하르토는 [[유엔식량농업기구]]로부터 금메달을 얻었다. 1969년까지 최소 200만 톤의 쌀을 수입해야만 했던 나라가 16년 뒤에는 아프리카 기근을 돕기 위해 100만 톤의 쌀을 수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의 쌀 생산량은 1220만 톤에서 2580만 톤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수하르토 가문의 부정부패가 있었다. 수하르토는 슬하에는 3남 3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수하르토의 정치적 입김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재벌이 되었다. 수하르토 또한 자선재단을 운영하며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하르토 집안은 현재까지도 인도네시아의 항공사, 은행, 방송국, 택시회사 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경제 권력을 쥐고 있다.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최상의 사업 파트너를 찾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는데, 왜냐하면 수하르토 대통령과 그의 자식들이 바로 인도네시아 최대의 재벌이자 사업가였기 때문이였다. 수하르토 일가의 사업체는 모두 수백 개에 이르고 총자산 가치는 4백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며 텔레비전 및 라디오방송, 상업위성방송[* 1980년대까지 인도네시아 방송사업을 독점했던 국영방송(현재는 공영방송으로 전환된) TVRI는 물론이고 1980년대 후반 방송법 개정으로 민영방송이 허가 된 이후로는 아예 민영방송 사업에도 손을 댔다.], 은행업, 제약회사, 화학공장, 제지, 펄프, 해운, 항공, 호텔, 쇼핑몰, 택시운수, 자동차제조[* 자동차 매니아였던 아들 토미가 [[기아 세피아]]를 자국 브랜드로 도입하였으며, [[오스틴 메트로]] 기반의 고유모델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세피아 도입을 할 때 아들 고집에 넘어간 수하르토가 직접 국영은행들에 자금 대출을 지시했다. 그 사업이란게 한국에서 완성차를 수입해서 로고만 바꾸는 수준이라 관료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대출 금액을 줄이는 선에서 끝내야 했다. 그리고 토미의 회사는 경제위기 때 부도를 내 인도네시아 국민들 세금을 날려먹었다.] 등 돈이 될 만한 사업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어 해외 언론에서 '수하르토 주식회사'라는 조롱을 받았다. [[도둑정치|그렇게 수하르토는 32년간 집권하는 동안 국고에서 최대 4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빼돌렸다]]. 1996년에 [[포브스]]지는 수하르토의 개인 순자산이 160억 달러이며 '''세계에서 4번째로 부유한 사람'''으로 언급했고,[* 참고로 수하르토가 당시 대통령으로서 받은 월급은 겨우(?) 21,000달러였다.] 2004년 국제투명성기구(TI)는 수하르토를가 재임기간 동안 350억 달러를 챙긴 것으로 추정하며 수하르토를 '''세계 최악의 부패 지도자'''로 꼽았으며, 1999년 5월 24일에 Time Asia지는 수하르토 일가가 수하르토의 집권 기간 동안 무려 '''732.4억 달러'''를 횡령했다고 보도했다.[* 이 금액을 2022년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303.7억 달러'''인데, 이는 2022년 기준으로도 [[세계 부자 순위]] '''4위''' 안에 드는 엄청난 거액이다. 게다가 732.4억 달러도 세계 부자 순위 '''15위''' 안에 들 정도의 거액이다.][* 참고로 수하르토 치하에서 GDP가 가장 높았던 [[1996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의 총 GDP는 약 2274억 달러였다.] 그래도 동시기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처럼 해외로 빼돌리는 짓은 안 했고, 적어도 본인은 과도한 사치로 구설수에 오르기는 커녕 어떠한 사치 의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다행이라 해야 할까?[* 실제로 수하르토가 퇴진 후에 거주한 집의 외부 사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1/SuhartoHouse.jpg|#1]] [[https://nasional.kompas.com/read/2017/01/31/14351051/melintasi.rumah.cendana.kediaman.sang.penguasa.orba.?page=all|#2]])과 내부 사진([[https://news.detik.com/foto-news/d-3667563/obrolan-panjang-fadli-zon-dan-soeharto-di-2007/1|#]])을 보면 오늘날 환율로 환산하면 거의 100조 원 이상의 거액을 보유했던 사람의 집이라 하기에는 확실히 검소하다 못해 초라해 보인다.] 거기다가 수하르토 일가는 동티모르의 약 40%를 포함하여 약 3.6만㎢의 영토를 보유하며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1,251개의 국내 기업[* 대부분 수하르토의 중국계 동료가 운영했다.]의 주식을 무료로 받았고 외국의 기업들은 수하르토의 가족이 보유한 기업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도록 권장되었으며, 수하르토 일가는 매년 공공 및 민간 부분에서 수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기도 했다. 수하르토의 장녀 시티 하르디얀티 룩마나(Siti Hardiyanti Rukmana, 1949~)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관리했으며, 차남 밤방 트리핫모조(Bambang Trihatmodjo, 1953~)는 코코아, 목재, 호텔, 텔레비전, 자동차, 쇼핑, 보험 등 다양한 업종의 90여 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 경영인이고 또 다른 아들은 석유 독점 사업을 했다. 또한 수하르토의 부인은 규모가 큰 인도네시아 기업 간의 거래에 개입해서 무조건 10%의 수수료를 받아 '10% 부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재산은 개인적으로 설립한 재단으로 흘러들어갔고 수하르토의 추종자들과 비판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뇌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수하르토의 30년에 이르는 장기집권은 족벌경영의 폐단이 계속해서 누적되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이는 [[1998년]]의 IMF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재벌들은 정권의 특혜를 받아 원자재 수출이나 내수 산업에만 집중했고, 대부분의 제조업 수출은 외국계 기업이 담당했다. 인도네시아의 인건비가 상승하자 이들 외국계 기업들은 낮은 인건비와 더 현대적인 사회기반시설이 있는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해 인도네시아 경제를 곤경에 빠트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