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하르토 (문단 편집) === 경제위기와 실각 === 수하르토가 실각한 직접적인 계기는 [[1997년]] 일어난 [[1997년 외환 위기|동아시아 금융위기]]이지만,[* 이때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는 1054달러(1997)에서 459달러(1998)로 단 1년 만에 이전의 '''절반 미만(!)''' 정도로 폭락했고, 결국 인도네시아는 2003년에야 겨우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전의 1인당 GDP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국제통화기금|IMF]]와의 협상 과정에서 수하르토가 보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는데 수하르토가 32년 동안 이뤄놓은 부패구조를 없애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하르토는 IMF의 구조조정안을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7번째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되는 데에 성공한 후 단행한 개각에서 IMF에서 개혁대상으로 지목한 자신의 딸을 내각에 포함시켰다. 딸이 운영하는 [[택시]]회사는 이미 거액의 외화를 빌리다가 [[홍콩]]의 한 은행과 함께 부도가 나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May_1998_Trisakti_incident.jpg|width=100%]] 하지만 그 결과 IMF의 자금을 받지 못하게 되고 인도네시아의 생필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그러자 이에 국민들은 생필품 가격을 내리라는 시위를 연일 계속하게 됐고, 이에 유류 및 전기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자 시위는 급격히 과격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수하르토가 [[이집트]]를 국빈 방문하던 1998년 5월 12일, 자카르타의 트리삭티 대학교에서 수하르토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에 군대가 실탄을 발포하여 대학생 4명이 숨지고 15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상단 사진이 바로 트리삭티 대학교에서의 시위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이 여파로 시위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자카르타]]를 비롯한 전국에서 약탈과 방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수하르토의 지지기반인 군부마저도 동요하기 시작하자 각국은 인도네시아의 자국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수하르토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개발도상국정상회담에 참석해 골프나 치고 있는 등 아직까지도 시위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수하르토는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다가 5월 15일 급히 귀국해 “곧 총선을 실시하고 전 장관을 경질하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등을 돌린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즉각 하야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과도기 대통령인 (자기 밑에서 부통령을 한) 하비비에게 장관 몇 사람의 임명권만 주면 퇴임하겠다고 권력을 구걸하였고, 마지막에는 사위인 수비안도 준장과 자카르타 수도 경비사령관을 시켜 국민의 데모를 중국계가 조직했다는 조작된 소문을 퍼뜨리고 민심을 호도해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부의 조작만으론 이미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고 미국과 군부마저 수하르토에게 등을 돌리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던 수하르토는 결국 [[1998년]] 5월 21일에 장장 30년 동안 역임해 온 인도네시아 대통령직에서 사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