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하르토 (문단 편집) ==== [[동티모르]] 독립운동 탄압 ==== 사실 수하르토는 본격적으로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본토에서는 그렇게 심한 폭정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독립을 요구하는 인도네시아 지역들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는 수만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만약 모두 독립을 허용한다면 인도네시아는 사라지고 만다."면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이와 유사한 케이스로는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있는데, 레오폴드 2세는 본토 벨기에에 한해서는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나름 무난하게 다스린 것과 달리, 국가의 식민지가 아닌 황제의 '''사유지'''였던 [[콩고 자유국]]에는 '''당대의 [[제국주의]] 국가들마저 분개할 정도로''' 극악한 학정을 저질렀다.] 유엔 동티모르 수용, 진실, 화해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군이 1975년~1999년 동안 동티모르를 점령하면서 최소 약 10만 3000명, 최대 약 18만 3000명이 살해, 실종,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인권단체들은 이보다 더 많은 35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로 수하르토가 물러난 1998년에 동티모르 인구는 약 87만 명이었다.] 또한 독립을 요구했던 [[서파푸아]]에서도 10만 명이 죽어나갔으며, [[아체]] 주에서도 1만 500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수하르토는 1975년 12월 7일[*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이날은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이 선포된 지(1975년 11월 28일) 겨우 '''9일'''밖에 되지 않은 날이었다.]에 인도네시아군의 정예 공수부대를 동티모르의 중심지 [[딜리]]로 침공시켜 티모르티무르 주로 강제병합시킨 후 1976년 1월에는 동티모르 내의 모든 정당을 해산하도록 명령했으며, 동년 7월에는 동티모르 합병을 공식 선언하고는 인도네시아에 복종하는 인사들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웠다. 독립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최악의 상황에 빠져든 수많은 동티모르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수하르토는 이들에 대해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만행들을 벌이게 된다. 실제로 동티모르 침공이 시작한 날로부터 바로 다음날이었던 1975년 12월 8일에 인도네시아군은 딜리에 들어오자마자 500명의 화교를 색출해 살해했고, 많은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이 절벽에 줄지어 선 후 총살되고는 시신이 바다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들 중에는 호주인 기자 로저 이스트(Roger East, 1922~1975)도 있었다.] 1976년 2월에는 아이레우 마을에 있는 3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을 총살했고, 동년 6월에는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프레티린)의 공격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인도네시아군 부대가 보복 차원으로 서티모르 국경 근처의 라마크난에 있는 난민 수용 캠프를 찾아가 집들을 불태운 후 5~6천명이 수용된 캠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천 명을 학살했고, 심지어 1981년 3~4월에는 '보안 작전'을 실시하여 5천~8천 명의 동티모르인 남성과 소년들[* 대부분 15~50세였으나, 9세 소년과 60세 남성이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을 동티모르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항하기 위한 [[인간방패]]로 쓰게 하기 위해 산을 행군하게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피로 속에 죽거나 '게릴라의 통과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군에게 총살당했다. 거기다가 수하르토의 군인들은 [[연좌제]]를 적용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는 이를 오히려 타당화했는데, 실제로 1976년 초에 레멕시오와 아일류에서 3살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학살되었을 때 인도네시아군은 그곳의 주민들이 모두 '프레티린의 씨앗에 감염되었다'고 주장했고, 1981년 9월에 라클루타에서의 학살에 참여한 인도네시아 군인은 "당신이라면 들판을 청소할 때, 크도 작든간에 모든 뱀을 죽이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까지 주장했으며, 인도네시아의 고위 장교들은 인도네시아군에 저항하는 자들이면 [[증손]]까지 절멸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동티모르의 많은 여성들은 '게릴라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기적으로 군인들과의 강제 결혼을 당하거나 불임 시술을 당하거나 무자비한 강간을 당하기도 했으며, [[더러운 전쟁|약 4천 명의 동티모르계 어린이들이 납치되어 가족들과 헤어진 후 고위 군인들에게 강제로 입양되기도 했다.]] 게다가 군부는 독립운동가로 의심되는 동티모르인들을 화장실도 없는 빈약한 초가집으로 구성된 캠프에 가두고는 아사하거나 질병으로 죽게 방치했고, 농작물과 가축을 파괴하고 적십자의 의료 지원과 외부의 식량 지원을 거부하며 의도적으로 [[기근]]을 조장해 동티모르인들의 세력을 악화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1979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의 한 특사는 어떤 수용소에서는 수용자의 약 '''80%'''가 '[[비아프라]]만큼이나 심한'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보고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군인들은 처형된 민간인들의 머리를 [[효수]]하거나 공군을 이용해 네이팜탄을 투하하기도 했고, 화학무기를 살포하여 주민들이 먹는 음식과 물이 오염되게 하거나 [[킬링필드|고의적으로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바위에 내리쳐 죽이는]] 극악무도한 짓까지 저질렀으며, 심지어 어느 부대의 지휘관은 반군의 [[심장]]을 요리해 먹기까지 했다. 한편 미국은 수하르토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 때와 비슷하게 이 학살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묵인했는데, 실제로 [[지미 카터]] 행정부는 대인도네시아 군사원조를 이전의 4배로 늘렸고, [[뉴욕 타임즈]]는 1977년부터 1978년 사이에 동티모르를 다룬 기사를 한 건도 싣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1년에 뉴욕 타임즈의 특파원이던 헨리 캄[* Henry Kamm, 1925~. 참고로 캄은 1978년에 인도차이나 난민들에 대한 취재로 [[퓰리처상|퓰리처 국제보도상]]을 수상한 사람이었다.]은 역사적으로 식량이 부족했던 이 섬에서 치열한 전투와 그에 따른 기아 때문에 발생한 대량사망 사태를 '학살'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과장법'이라며 "쏟아져 나온 증거라는 것이 프레틸린과 한 패이거나 열성적 지지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이런 주장에 대해 세계는 인도네시아 관리들의 부인 발언과 대비하면서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