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사 (문단 편집) == 殉死 == 모시고 있던 주군이나 주인이 세상을 떠날 때 신하나 하인 등이 자결하는 것. 아내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도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나, 사회 풍습에 따른 간접적 강제를 포함하여 실질적으로는 강제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한국사에서도 등장하는데 [[고구려]] [[동천왕]] 22년(248)조에는 왕이 붕어하자 가까운 신하들이 스스로 순장하려고 하자, 사왕([[중천왕]])이 이는 예가 아니라 금했으나 장례일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순장이 서서히 금지되어가지만 지배자는 여전히 신격화되어있어 일어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순장]]의 일종이며 하위개념이긴 하지만, 양자에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순장이 후대에 이르러 발전(?)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순장과 순사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순장은 주인의 무덤에 함께 묻히지만, 순사는 따라 죽는 것일 뿐 같이 묻히지는 않는다. * 둘째, 함께 묻힌 순장자는 주인의 부장품으로 취급되어 무덤 속에서도 주인을 모시는 형태를 취한다. * 셋째, 순장은 본인이 원하거나 말거나 이루어지지만, 순사는 형식적으로는 아랫사람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 것으로, [[자살]]에 해당한다. 라는 점. 즉, '다른 무덤에 묻힘 + 부장품 아님 + 자발적으로 죽음'이라는 점에서 순장과 다르다. 예를 들자면 [[진시황릉]]에 부장된 말의 경우 순장에 해당하지만, [[숙종(조선)|숙종]]이 죽자 슬퍼하여 음식을 끊고 따라죽은 뒤 숙종릉 근처에 묻혔다는 고양이 금손이[* 숙종은 금손이를 반려묘로 키운 애묘인이었다.]의 경우는 순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아래에서 논할 [[열녀]]나 [[사티]]의 경우, 어쨌거나 아내가 묘주인인인 남편의 부장품 취급으로 묻히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로 묻히며 속사정은 어떻든 겉으로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기에, 사전적인 의미의 순장에는 해당되지 않고 순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고대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세계 각지에서 순장을 대체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원래 순장은 '불필요한 적이나 노예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에서부터 '일종의 [[제례]]'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규모의 인원을 강제로 처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문명 수준이 발달함에 따라 대규모 노동력의 상실, 처리가 경제적인 손해가 되었으며,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어 강제적으로 죽이는 일에 당사자의 반발이나 반항도 따르기 시작했다. 결국 '''강제로 껴묻거리 당하는 [[순장]]은 그저 어리석은 짓이고, 자발적으로 주인을 따라 죽는 순사가 명예롭지 않냐?''' 정도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발전하였다. 실제로 [[사기]] 등의 고대 기록을 보면, 시대가 흐를수록 [[순장]]보다 순사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순사는 결국 순장과 달리 대규모의 사회 전통으로서 제도화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어찌됐든 순사가 순장과 다른 점은 '''자발성'''인데, 겉으로는 어찌 됐든 간에 속으로는 누구나 자기 목숨이 아까운 법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실제로 순사를 단행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순장은 강제성이 동반되기에 숙청용으로 애용되었지만 순사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기에 더 줄었을 것이다. --순장은 강제로 때려죽일수 있지만, 순사는 그런게 불가능했다는 얘기.-- 동아시아의 경우, [[한나라]]의 성립 이후 통치 이념으로 [[유교]]가 들어선 뒤 고도로 유학적 개념과 논리가 발전하여, '''주군을 따라 죽는 게 진정한 충(忠)이 아니라, 주군의 뜻에는 맞지 않더라도 목숨을 걸고 자신의 뜻을 표명하는 것이 진정한 충(忠)'''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 바로 [[조선]]의 경우. 다만 어찌된 일인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순사도 아닌 '''[[순장]] 자체를 부활시키긴 하였다.''' 당연히 중국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이 경우는 한족의 풍습이 아닌 북방 민족의 풍습이 유지된 것이다. 명나라도 청나라도 초기에나 순장 풍습이 있었지 중후반에는 [[정통제]]와 [[강희제]]가 금지시켜 사라졌다. 서양에서는 중세에 접어들며 순장이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순사 또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자살을 엄금하는 [[기독교]] 전파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1983년 교회법 개정 전까지 가톨릭은 자살자의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장례 미사|장례 미사]]를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자살자에 대한 장례 미사 가능 여부|치러주지 않았고]] 이는 곧 자살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었으므로, 순장, 순사가 빠르게 사라지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남편이나 주군의 사망으로 슬픔에 겨워 병에 걸려 따라 죽게 되었다는 형태라면 자살이 아니라는 입장이기에 이런 형태의 죽음이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었고 이런 형태의 죽음을 문화적, 역사적 의미로서의 순사로 보기에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교리 역시 자살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순장과 순사 모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어쨌거나 순사는 순장과 마찬가지로 현대에는 주류 문화로 취급받지 못하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근대 이전까지 빈번하게 일어났고 주로 여성이 희생양이었다. 왜 하필 아시아 지역이냐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 지역에서는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엄격한 자살 금지 교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특히 인도의 '''[[사티]]'''가 그 극단적인 예이다. 전근대 한국이나 중국에 미덕으로 칭송받던 '열녀 일화와 [[열녀문]]'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사티는 강요'''받기에 순사보다는 순장에 가까운 반면, 열녀의 경우에는 과정이야 어쨌건 '''자발적'''이어야 했고 그래야 인정받았다. 예시로 열녀문이 세워지는 이익을 노리고 과부를 살해하려던 사람들이(그것도 친척들이었다.) 걸려서 처벌받은 바가 있으니 저렇게 죽음을 강요하는 건 '''공식적으로 범죄'''로 봤다는 증거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처벌 수위도 장난이 아니라 민(民) 관(官) 할 거 없이 고을 전체가 강등당하는 처벌이 내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