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단 편집) === 근대 ===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홀슈타인 공작령은 주권지역이 되었다. 1864년까지 [[독일 연방]]의 일원이긴 했지만 여전히 덴마크 왕실의 작위였다. 그래서 [[독일 연방]]에 덴마크 왕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불러온 [[민족주의]]가 이 지역에도 퍼져나가면서 독일계 거주민이 많았던 홀슈타인과 남부 슐레스비히에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독립 주장이 등장한 반면 덴마크의 민족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 지역을 덴마크에 합병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례의 민족적 대립에 인해 일어난 외교적 위기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라고 한다. 민족적 대립의 와중에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7세]]가 1848년 [[자유주의]]에 입각한 [[헌법]]을 공표하였고 추후 상속에 대한 우려로[* 프레데리크 7세는 자손이 없었기에 기존 상속법에 의하면 사후 덴마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동군연합은 분리될 예정이었다.] 강제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상속법을 개정, [[1848년]] 3월에는 아예 슐레스비히의 덴마크로의 합병을 선언하자 이 지역의 독일계 귀족들이 이것에 거세게 반발했다. 독일계 귀족들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만의 독자적인 헌법과 [[독일 연방]] 가입[* 홀슈타인이야 애초부터 독일 연방에 가입되어 있지만, 슐레스비히까지 독일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을 덴마크로부터 요구하면서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개입까지 일어나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열강들의 개입으로 덴마크와 프로이센 모두[*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합병과 홀슈타인의 상속법 개정,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독립/프로이센으로의 합병.] 바라던 바를 못이룬 무승부로 끝난다. 이는 아래 문단의 2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리베 조약을 지킬 필요가 없는 1863년, 프레데리크 7세의 죽음으로 두 공작령이 드디어 분할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연합하여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덴마크와 전쟁]][* 이를 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라고 부른다.]을 치렀고, 덴마크는 결국 패하여 이 일대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후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에 관한 영유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본래는 서로 하나씩 차지하기로 했지만,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추방하고 [[독일 제국|프로이센 중심의 통일 독일]]을 건설하기를 원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일부러 영유권을 가지고 오스트리아에게 시비를 걸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 승리한 프로이센이 이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독일 제국]]을 건설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체결된 프라하 조약 5항에서는, 북부 슐레스비히에는 [[덴마크인|덴마크계]] 거주민이 많았으니 북부 슐레스비히의 덴마크 복귀/프로이센 잔류를 놓고 주민투표를 실시하도록 명시했지만 자기들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올 것이 뻔했던 만큼 프로이센 측은 이 주민투표를 결코 시행하지 않았다. 1876년에는 작센라우엔부르크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과 병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