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키피오 (문단 편집) == 스키피오 가문의 인물들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아프리카누스의 증조할아버지, 아시나의 아버지. 기원전 298년의 집정관으로 제3차 [[삼니움 전쟁]]에서 [[삼니움]]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을 무찔렀다. * [[스키피오 아시나|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의 형제, 그나이우스 칼부스와 푸블리우스의 삼촌. 기원전 260년, 254년의 집정관.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59년 집정관)]]: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18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칼부스의 동생. [[제2차 포에니 전쟁]] 첫 해인 기원전 218년의 집정관이었다. 원래 스페인 전선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하자 형 그나이우스에게 휘하 군단을 맡기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와 본토의 예비군을 이끌고 한니발을 상대했다. 티키누스(티치노)에서의 기병전([[티키누스 전투]])과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패했다. 이후 지원군을 이끌고 스페인에 파견되어 카르타고군의 하스드루발, 마고 바르카 형제와 맞섰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칼부스는 [[대머리]]를 의미한다. 아프리카누스의 삼촌. 기원전 222년 집정관을 지냈으며, 전쟁 첫 해인 기원전 218년에는 집정관이었던 동생 푸블리우스를 수행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향함이 분명해지자 푸블리우스의 군단을 받아 대신 스페인으로 향했으며, 이후 스페인으로 파견된 푸블리우스와 함께 하스드루발, 마고 형제의 카르타고군을 상대했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으로 기원전 190년의 집정관. [[마그네시아 전투]]의 승리자로 아시아의 정복자라는 아시아티쿠스 칭호를 얻었다. 스키피오 가문의 분가격인 아시아티쿠스 가문의 시조이다. 아프리카누스의 사망 이후 셀레우코스 원정 당시 공금횡령이 있었다며 정적들로부터 공격당해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대 그라쿠스|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의해 사면되었지만 국가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명예가 저하되었다. 벌금을 내는 과정에서 친구들의 어떤 도움도 거절했다고 한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기원전 19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이름이 모두 같은 인물이 있다.] 나시카는 뾰족한 코를 의미한다. 첫 번째 스키피오 나시카는 기원전 191년의 집정관이었으며, 그나이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의 아들로 아프리카누스의 사촌이다. 그의 아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아프리카누스의 장녀와 결혼하면서 두 핏줄이 합쳐져 이후의 스키피오 본가인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이 되었다. 위의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집정관직을 경쟁하는 등 아프리카누스와는 아주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저명한 법학자였다고 한다.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아들의 양자.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코르쿨룸은 '영리한' 정도의 뜻을 가지는 라틴어 고어로, 이 별명은 코르쿨룸 사후에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당대의 그는 스키피오 나시카로 불렸다.]: 위의 나시카의 아들로 아프리카누스의 사위이자 5촌 조카. 집정관을 2회 역임하고 감찰관, 프린켑스 세나투스,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을 지내는 등 당대의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법학자이자 [[키케로]]가 인정한 웅변가였다고 한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군 분견대를 지휘했고 이후 본군에 합류해 [[피드나 전투]]에도 참전했다. 첫 번째로 집정관에 당선된 기원전 162년에는 이전해의 집정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의 선거 절차 실수로 당선되자마자 사퇴해야 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충실한 보수주의자로 로마에 퍼지는 [[헬레니즘]] 문화를 반대했으며, 아프리카누스의 정적이었던 [[카토|대 카토]]와 달리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코르쿨룸의 아들. 기원전 138년의 집정관과 최고 제사장을 지냈다. 사촌이기도 한[*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가 아프리카누스의 막내딸이다.]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살해 주동자였고 이후 로마에서 쫓겨나 [[페르가몬]]에서 사망했다. 성격이 오만하고 평민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도 사이가 껄끄러워 스키피오 가문의 무덤 관련으로 치졸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기원전 83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뒤를 이은 [[포풀라레스]]파의 지도자 중 하나였다.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의 증손자, 코르쿨룸의 고손자. 보통 [[메텔루스 스키피오]]라고 불린다. 본명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로,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의 마지막 후예이다. 가문의 세가 기울고 같은 이름의 아버지가 법무관까지만 지내고 사망하여 [[메텔루스 피우스]]의 양자가 되었지만 파트리키 귀족 신분을 유지했으며 계속 스키피오라고 불렸다. 친가는 공화정 역대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스키피오 가문, 입양된 가문은 공화정 후기를 지배하다시피 한 당대 최고의 평민귀족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으로 당대 로마에서 가장 화려한 혈통이었다. 출신답게 골수 원로원파로, 딸 코르넬리아가[* 원래 [[크라수스]]의 아들인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결혼했으나 푸블리우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미망인이 되었다.] [[폼페이우스]]와 결혼하면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와 가까워진 것이 [[카이사르의 내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혼의 도움으로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와 공동으로 집정관이 되었으며, 귀족 세력의 중심으로 카이사르 반대파에 힘을 실었다.[* 원로원파(옵티마테스)의 핵심인 메텔루스 가문은 100년 동안 집정관 역임자만 10명을 훌쩍 넘게 배출한 번성한 가문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남계 후손이 없어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유일한 구심점으로 남은 상황이었다.] 기원전 49년 초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보내도록 설득하여 내전 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에 시리아 총독으로서 속주를 착취하며 카이사르에게 대항할 전력을 긁어모았고, 파르살루스 전투의 지휘관 중 하나였지만 결국 패배했다. 이집트로 도망친 끝에 암살당한 폼페이우스와는 달리 북아프리카로 도망쳐 상당한 전력을 재건했지만 [[탑수스 전투]]에서 다시 카이사르에게 패했다. 끝까지 카이사르에게 저항하려 히스파니아로 향했으나 카이사르파 용병 함대에게 궁지에 몰리자 자살했다. 무능한 지휘관이자 속주민 착취자로 후세의 평가가 박한 편이며, 조상들의 능력이나 고귀함을 전혀 이어받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로마사의 권위자 로널드 사임은 그를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마지막 스키피오'라고 언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