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 (문단 편집) ==== 경제적 원인 ==== * 메세니아의 독립 흔히 '노예 계층'으로 묘사되는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계급은 엄밀히 말하자면 '피정복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시기부터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이웃 폴리스 '메세니아'를 점령하고, 메세니아 주민 전체를 '국가의 노예'로 삼음으로써 농업 경제력과 자기들 내부적으론 상대적으로 평등한 생활상을 확보한 것이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제국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스파르타와 같이 경제력의 거의 모든 부분을 식민지 하나에 의존했던 경우는 유일무이하다. 특히 남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아예 유례를 찾기도 어렵다. 심지어 자국의 화폐가 다른 폴리스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할 정도로 부실했던 것이 스파르타 경제의 현실이었다. 이건 스파르타의 화폐는 '''철 막대기'''였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첫 부분에 상술되었던 '''식초로 담근 화폐'''가 이것이다. 한마디로 그냥 쇠 막대기도 아니고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들수도 없도록 일부러 녹을 슬어버리게 한 완벽한 쓰레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 화폐로 쓰고 있었던 거다. 그나마 스파르타 내에서야 공권력으로 억지로 화폐로 통용되게 할 수 있었겠지만 스파르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타 폴리스에서는 먹힐 리가 없었다.] 이 역시 리쿠르고스의 개혁 때 정해졌다고 하는데, 사치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른 폴리스 상인들이 철 막대기를 받고 사치품을 스파르타에 팔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폴리스에서는 금이나 은 같은 걸 화폐로 사용했으니 스파르타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자금 문제로 고민하는 것과 아이기나와 헤일로타이 일화를 통해 현재 쇠 막대 화폐는 과장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독자 화폐가 없던 건 사실이고 스파르타는 기원전 280년이 되어서야 독자 화폐를 발행하게 된다. 화폐 자체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실존 인물인지도 불분명할 정도로 오래 전 사람인 리쿠르고스 때 정한 통화 정책을 한 국가 연맹의 맹주가 된 시점까지도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통화 정책의 부작용은 시대가 지날수록 심해졌다. 이후 스파르타가 패권을 상실하여 군사적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는 면밀히 따져보면 스파르타식 경제 정책(특히 통화 정책)이 야기한 결과이다. 테베가 스파르타를 꺾은 이후, 테베는 스파르타로부터 메세니아를 독립시켜서 떼어내 버렸다. 메세니아인들은 수백 년 만에 독립을 되찾았고, 한 맺힌 메세니아는 독립하자마자 다른 폴리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스파르타에 모든 지원을 중지했다. 이로써 스파르타는 농업 경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남은 토지는 대귀족에게 집중돼 사회 내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져 전통적인 스파르타 중보병을 양성하기도 어려워졌다. 더구나 스파르타 본토 내의 농업 수확량도 매우 적었는데, 수백 년간 스파르타의 식량을 메세니아의 농업에 의존하다 보니 본인들 스스로 신농법 개발이나 종자 개량에 무지했다. 그나마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거나 전수받은 메세니아인이나 노예는 반란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죽여버린 탓에 새로운 농사법이 전수되지 못했다.[* 참고로 이것도 문제인데 전근대에는 농업의 생산성이 곧 인구부양능력이었다. 물론 아테네처럼 상업을 키워준다면 농업생산량보다 웃도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지만 스파르타는 상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나마 농업 생산력이라도 높여 부양할 수 있는 인구의 한계를 올려야 하는데 이걸 안 하니 스파르타라는 나라는 근본적으로 인구가 늘어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도 라코니아는 여전히 스파르타 밑에 남아 헤일로타이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 덕에 스파르타는 패권은 잃었지만 국체는 보존할 수 있었다.[* 라코니아 지역은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다가 스파르타가 로마와 전쟁했다 지면서 해방된다.][* 메세니아와 라코니아의 차이는 지리적인 점에서 짐작해볼 수 있는데 둘 다 스파르타와 가까운 편이라 이해가 가기 쉽지 않으나 메세니아와 스파르타 사이에는 산지라는 천연 방어벽이 존재하지만 라코니아와 스파르타 사이에는 그런게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스파르타와 라코니아에는 모두 그 사이로 강이 하나 흐르는데 스파르타쪽은 상류 라코니아 쪽은 하류다. 즉 뻥 뚫린 라코니아는 설사 잃더라도 다시 정복하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메세니아는 산지를 넘어가며 진격하거나 그게 싫으면 해군으로 재정복하든가 둘 중 하나인데 둘 다 라코니아보단 어려울 것이다.] * 양극화 지나친 공동체주의와 양극화도 문제였다. 스파르타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집단주의를 택했지만, 경제 부분에서는 개인에게만 부담을 지는 원칙을 고수했다. 성인 남성들은 15명씩 조를 짜서 함께 공동 식당(Syssitia)에서 식사를 했지만, 그 비용은 각자 개인이 부담하는 독특한 체제였다. 자녀를 학교(Agoge)에 보내는 비용도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공동 식비나 교육비를 내지 못하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으로서 최악의 수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시민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기에 개인은 무조건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했고 거부권도 없었다. 물론 스파르타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양극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경제 시스템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용이 꽤 되긴 했어도 헤일로타이들이 농사를 지어 그 절반을 바쳐야 했기에 경제적인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부(富)가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고작 100여 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를 기점으로 보면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고작 전 시민의 3% 정도였다는 소리다.] 결국 빈곤의 늪에 빠진 절대 다수의 스파르타인들은 본국에서의 삶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테네 등 주변 국가들로 도망쳐버리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가뜩이나 영아 살해로 인구가 감소하던 스파르타에서 시민권을 가진 남성인 [[스파르탄]](Spartan; Spartiate)들은 기원전 640년 9천 명에서 300년 뒤에는 1천 명으로 급감했다. 아무리 무적의 군대를 갖고 있던 스파르타라 해도 그 숫자가 턱없이 줄어들자, [[중과부적]]으로 몰려드는 적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스파르타도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신자나 만혼자를 처벌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인들이 스스로 검소함을 버리고 사치에 취하면서 생긴 문제도 있다.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검소함을 강조하는 스파르타의 현실상 스파르타인들은 그러한 격리된 환경 속에서 생활했기에 경제 관념에 무지하거나 제대로 인지를 못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가 동맹시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소위 돈 맛을 알게 된 스파르타인들은 거의 무제한적인 사치에 빠졌다. 경제 관념을 알고 있어도 사치에 빠지기 쉬워서 몰락하기 쉬운데 경제 관념을 모르는 매우 극단적인 케이스의 부류가 사치에 빠지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토지를 팔아제끼는 사태까지 번졌다.[* 이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 키나돈의 반란모의 사건이다.] 이는 결국 앞서 이야기된 공동 식사 문제와 교육비와 같은 비용을 내지 못하는 사태가 되면서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성인 [[스파르탄]](Spartan; Spartiate)들이 대거 몰락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병력으로 동원하거나 그들의 기본 사회 체제인 극단적인 전사 양육에 참여하는 숫자가 대대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형태는 시민권을 갖는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런 사회 체제 변화가 오는 과정에서도 스파르타는 그러한 사회 구조 개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복고를 주장하는 형태나 그저 정체된 사회 체제를 유지함으로서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다. 이런 전쟁과 내부적인 이유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스파르타는 그나마 명맥은 유지됐지만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패권국의 지위를 노릴 수 없는 약체 폴리스로 전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