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 (문단 편집) ==== 일반적 인식에 대한 반론 ==== 크세포논의 "라케다이몬인들의 헌법"과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에 따르면 에포로이는 결코 현대인이 생각하는 집정관(내각/행정부 각료)가 아니었다. 이들의 핵심 권한은 왕의 결정을 비토하는 것과 감사권, 그리고 왕을 두 명 이상 상시 따라다니면서 공증인 겸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힘을 못쓴 것으로 서술되는데, 민회에서 후보 중에서 추첨을 통해서 뽑혔기 때문이다. 후보의 숫자가 몇 배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가난한" 인물들이 뽑혔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엘리트 중에서 뽑힌 것은 확실히 아니다. 임기가 1년에 불과하고 재임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전문성을 쌓을 시간도 없었고,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쉽게 세력가들에게 휘둘렸다고 한다.[* 사실 이는 아테네, 로마 등에서도 보이는 문제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집정관은 임기가 짧고 그보다 짬 많은 선임들이 정계에 많거나(로마) 아니면 제도 자체가 집정관들에게 권력이 몰아지지 않는 체제(아테네)라서 집정관은 그렇게 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비그리스권 국가인 카르타고도 공화정을 하면서 집정관을 두었지만 그리스와 로마와 비슷하게 원로원, 백인회, 민회를 또 두었다.] 또한 스파르타에서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은 소수의 부유한 [[여성]]들의 권력이 매우 강력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파르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은 아테네 출신의 [[철학자]] [[크세노폰]]의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스파르타는 소수의 불과 다섯 명의 여성이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여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파르타의 상속 제도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다른 [[고대 그리스|그리스]] 국가와는 달리 [[남자]]가 죽으면 그 아내가 [[유산]]을 상속했다. 만약에 [[과부]]가 죽을 때 아들들도 모두 이미 죽었으면,[*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딸]]이 [[상속]]했다. 결과적으로 딸에 대한 상속을 몇 번 대를 거치면서 엄청난 부를 가진 [[손녀]]나 증손녀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유한 여성들은 스파르타의 [[토지]] 절반 가까이를 소유했다. 그리고 이 부를 이용해서 스파르타 왕조차 쥐고 흔들 수 있었다. 당시에는 중요한 [[정치]]나 [[전투]]의 결정을 점을 쳐서 결정해야만 했는데, 자연히 [[제물]]로 바칠 [[가축]]이 많이 필요했다. [[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스파르타 왕으로서는 전쟁터에 한번 나가면 [[염소]] 100마리를 끌고 나가야 할 지경이었다. 자연히 왕 혼자서는 이러한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이것을 부유한 [[지주]] 여성들이 대어주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크세노폰은 물론 저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조차 이 점을 당시의 이웃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괴상하고 끔찍하게 여겼는지 서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