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 (문단 편집) === [[스파르타식 교육]]: 아고게(Agoge)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스파르타식 교육)] [[공교육]]과 [[평생교육]]을 실현한 국가로, '공동 식사' 문단에 소개한 피디티온이 그것. 물론 1차적인 기능은 식사 조인 동시에 전투 조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기능이 바로 교육수단이었다. 젊은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다. 실제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도 걸러들어야 할 것이 공교육은 공교육이었지만 완전시민들만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고 교육비는 국가의 지원 없이 가족들이 전액 부담하는 구조였다. 만약 교육비를 낼 수 없으면 시민자격을 박탈당하는 사실상 세금이나 다름없는 교육이었다, 평생교육도 사실상 노인까지 군인 혹은 예비군으로 부려먹는 과정에서 군사 훈련을 시킨것을 평생교육이라고 칭송하는 구조였다. 쉽게 말하자면 군역+세금을 징수당하는 과정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을 두고 귀족주의자들이 칭송한 것에 불과하다.[* "노인들이 '한때 우리는 용맹을 날리는 건장한 청년이었지'라고 노래하면 청년들이 '우리가 지금 그러하니, 원한다면 직접 와서 보시지' 라고 화답하고, 그러면 소년들은 '우리 곧 누구보다도 훨씬 강건하게 되리니라고 받아서 합창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연령 집단을 섞어놓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기들보다 더 경험이 많은 연장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공동 식사를 할 때에는 시내에서 행해진 고귀한 행동들이 거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거기에는 무례함이나 폭음, 사악함이나 [[음담패설]] 같은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이 식사하는 관습은 더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30세가 넘은 사람들은 집으로 걸어갈 때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밤길을 헤매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밤중에도 낮처럼 걸어야 했으며, 60세 이하의 병역 의무가 있는 자는 횃불조차 밝힐 수 없었다.", [[크세노폰]], 『라케다이몬인의 국가 제도』.] 다만 여성 교육은 확실히 선진적인 분야로 여자들을 집 안에만 몰아넣었던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여성들도 예외 없이 군사 훈련과 체력 훈련을 제공했다. 이 시대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선택이었다.[* '리쿠르고스는 여성에게 훈련을 가하였다. 경주, 씨름, 쇠고리, 창던지기 따위로 처녀들의 몸을 단련하여 튼튼한 모체에서 자녀들이 나며, 또 순산하게 되기를 도모하였다. 여자들이 부자연스럽게 안방에 숨어 있는 풍습을 버리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노출시키고 행렬 속에 끼며, 제례를 드릴 때는 남자들이 있어도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게 하였다. 남자들의 행동이 바르지 않을 때에 여자들의 야유는 질책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 장한 일을 해 여자로부터 칭찬받는 남자는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물러갔으며, 여자들의 농과 야유에는 심각한 꾸중의 칼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소에는 연장자뿐만 아니라 왕과 원로들도 임석해 있었다. 처녀들이 이와 같이 나체를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추잡하지 않고 점잖으며 순박한 기질을 양성하고 건강의 가치를 가르쳐 주며, 남자 못지않게 영예와 용기를 사랑하기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다만, 이런 교육법으로 중점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이 고작(?) 싸우는 방법이었단 게 흠이다. 스파르타는 고대 경제에 필요한 농업과 기술 교육같이 생산적 교육은 소홀히 했기에,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 메세니아가 독립하면서 스파르타는 초라하게 몰락한다. 그리스 폴리스들이 하나같이 선민사상이 강했다지만 스파르타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고, 군사 원정을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타지에서 들어오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사실상 [[우물 안 개구리]]인 셈.[* 사실 진짜 우물 안 개구리인 거 같기도 하다. 리디아 왕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그리스의 가장 강한 도시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신탁을 받았는데, 스파르타는 그 가장 강한 도시가 자신들을 뜻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리디아는 결국 페르시아에게 망했고 스파르타는 이에 분개하여 사신을 보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오니아 지방을 건드리지 말 것이며 이오니아를 건드릴 시 스파르타에 해명해야 할 것' 이라 주장했다. 문제는 이를 들은 페르시아 왕이 이오니아인 시종에게 '''"스파르타가 어디 있는 나라냐?"'''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 왕은 알면서 모른척 한 게 아니라, '''진짜로 몰라서였다.''' 분명 당시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국 반열에 있었다. 하지만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영토가 걸쳐 있고 당시 서아시아에서 일어났던 국가 중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한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스파르타란 한없이 작은 국가였다. 게다가 그때 페르시아 왕은 그 유명한 [[키루스 2세]]였다.] 이런 군사 교육도 대부분 개인 능력 향상과 오래된 진법 훈련이 전부였기에, 시대가 바뀌면서 개인 능력보다는 전술(&쪽수)이 그리고 새로운 진법 전략, 신무기 개발 등이 중시되면서 스파르타의 무장보병 전술은 군사적 우위에서도 서서히 몰락해 갔다. 물론 스파르타 전사 개개인의 역량은 당연히 20년 복무한 로마 군단병에 비해서도 크게 앞선다지만, 애초에 로마군은 전사 개인이 아닌 조직 자체가 강하고 숫적으로도 비슷한 데다 조직력도 어느 정도 갖춘 [[게르만족]] 세력 그리고 중장기병만 몇만 명을 데리고 제국 동부를 수시로 유린한 [[사산 왕조|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 일반인들을 군인으로 만든 군대로 수백 년을 버텨온 군대다. 숫적으로 압도적 열세에 개개인만 강한 스파르타군이 상대가 될 리 없었고, 결국 [[로마 제국]]의 정복 때 그나마 저항한 건 그래도 외부인을 데려와 써먹을 줄 알았던 마케도니아나, 외부 상대로는 폐쇄적이어도 내부적으로는 그럭저럭 수준 안 맞음을 용납해줘 항상 시민의 수가 스파르타의 최소 5~10배였던 아테네 정도지,[* 당장 아테네의 시민들을 보면 상당수는 스파르타에서는 제2 계급으로나 있을 이들이 많았다.] 정작 스파르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테귀라 전투는 펠로피다스가 무방비 상태의 오르코메누스를 포위하려고 신성 부대와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하다 스파르타 본국에서 대규모의 증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다시 철군하던 중 원래의 오르코메누스 수비대를 만나 벌어진 전투이다. 흔히들 오해하는 것이 스파르타 군대는 전원이 인간 병기로 단련된 스파르티아타이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 즈음해서는 정예 병력인 스파르티아타이의 수가 얼마 안 되었고 전쟁의 방식도 페리오이코이 등 일반 병력과 동맹군의 병력으로 전쟁을 운영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군의 수는 1,800명이 아니라 부대 단위를 봤을 때 1,000명에서 1,800명 사이로 추정되는 것이고 보이오티아 도시 오르코메누스를 수비하던 스파르타 수비군이었다. 전투 양상 측면에서도 신성 부대가 용맹성 그 자체보다는 비정상적인 부대 운용을 통해 스파르타의 전선을 깨어버린 게 승인이었다. 테베군은 종심을 비정상적으로 두텁게 하여 얇은 스파르타 전선을 뚫은 후 양 측면을 기병대와 함께 들이쳐서 스파르타군은 패주하였다. 테베군이 추격하였으나 오르코메누스가 가까워 전과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신성 부대 300명이 스파르타군 1800명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오류이다. 스파르타군의 구성을 오해하게 한 점, 즉 스파르티아타이가 전멸당했다고 오해하게끔 한 왜곡이 있는 점. 사료 부족으로 스파르타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없는데 근거 없이 1,800명으로 확정한 점. 게다가 오르코메누스가 가까워 테바이 군이 추적했으나 전과가 제한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파르타군이 전멸당했다고 한 점에서 모든 팩트가 틀렸다. 전투 양상에 관한 점에서 보더라도, 신성 부대가 종심을 뚫은 후 스파르타 수비군에는 없었던 기병대와 함께 측면을 공격한, 뛰어난 전술에 의한 전과를 신성대라는 단일 부대가 특별히 용감해서 다수의 인간 병기 스파르타군을 박살낸 것인 양 전투 양상을 단순히 도식화 해버렸다. 레욱트라 전투는 우익의 소수 스파르타군이 다수의 테베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붕괴된 전투이다. 그리고 스파르타군 전원이 스파르티아타이가 아니다. 일부만이 스파르티아타이였다. 마찬가지로 테바이 군에서 신성대 300만이 스파르타군과 싸운 게 아니다. 여러 연합체 중 하나가 신성대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료에서는 왕이 전사하기 전까지 소수의 스파르타인이 다수의 테베 인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음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헬레니카 VI.4.10. 여기에 스파르타의 인적 자원 고갈은 심각하긴 했다. 애초에 주로 전쟁에 의존하여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너무 폐쇄적이라 이겨도 1계급 구성원들이 조금만 죽어도 사실상 제 살 깎아 먹기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여자들에 대해 딱히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막상 최고 전사들은 상대적으로 의무를 덜 준수해도 되어서 열심히 자손을 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1계급 숫자가 처음부터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고 폐쇄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어 근교계수에 의해 점진적으로 근친의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주 안전하려면 대체로 1/512가 되어야 가능한 편이라 여기에 생식이 가능한 구성원 숫자 등을 고려하면 생각보다 인구가 상당히 많아야 한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 뛰어난 혈통의 후손이 조상들과는 달리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가 의외로 그런 부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뛰어난 사람들의 후손인 유럽 왕가면 해도 시간이 좀 흐르자 죄다 서로 어느 정도는 연관되어 있었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귀족들끼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경우도 흔했다.] 까놓고 세계사에서는 스파르타보다 더 숫자가 많았던 사람들도 폐쇄적이면 근친에 의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사실 하층 계급을 제외한 스파르타인들보다 훨씬 숫자가 많았던 유목민들도 근친에 의한 폐해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덧붙여, 아고게 방식이 사실상 구 [[일본 제국]]과 같은 [[똥군기]] 그 자체라 병사들이 명령 복종은 잘해도 스스로의 의사나 사고를 많이 억눌린 나머지 제대로 싸웠을지도 의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아고게의 단면만 보고 스파르타인들이 무서워 보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상 겪어보면 전쟁 판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