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 (문단 편집) === 기타 === * 섬세한 수사학을 발달시키고, 웅변 교육까지 실시한 아테네인 등 여타 폴리스 출신자들과 달리, 스파르타인들은 과묵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가끔 시큰둥하게 내뱉는 말 하나하나는 촌철살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화술을 '''라코닉(laconic)'''이라고 한다. 이런 면모가 만화 300에서도 멋들어지게 묘사된다. 아테네인들이 테르모필레 전투를 위해 레오니다스 왕과 합류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인원을 동원한 그를 야속하게 여긴다. 왜 겨우 300명밖에 오지 않았냐는 질문에 레오니다스 왕은 아테네에서 징발돼 온 병사들 중 몇 명의 직업을 묻는다. 조각가, 농부, 목수 따위의 대답이 돌아오자 이번엔 자신이 데려온 스파르타 군인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의 직업은 무엇인가?" 그들은 일제히 통일된 기합을 외침으로써 답을 대신한다. 레오니다스 왕이 덧붙인다. "당신들보다 많은 군인을 데려왔소." 밈화됨으로써 잘 알려진 300의 "[[This is Sparta!]]" 또한 그 어조와는 별개로 라코닉의 내용적 성격과 동일한 대사로 볼 수 있겠다. 패기가 강조되도록 각색된 영화에서의 그것에 대조되는, 페르시아 사신의 장광설에 차분하고 차갑게 "This is Sparta!" 한 마디로 답하고 까마득한 구덩이로 차 버리는 원작의 연출은 라코닉의 전형이며 밈화된 것과는 또다른 맛을 전한다.[* 다만 이게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닌게 원래 잭 스나이더 감독은 전형적인 라코닉 어투를 제라드 버틀러에게 주문했고 오케이 사인까지 받았으나 제라드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본인이 다시 촬영을 요청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300하면 흔히 떠오르는 그 명장면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스파르타인들은 사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전투에 뛰어난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전투 외에 다른 분야에는 어두운 척 하지만, 일단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은 짧은 언명으로 그대의 지식이 어린애 수준이라는 것을 폭로시켜 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적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 >아기스 2세, 스파르타의 왕 >사모스인들이 보낸 사자들이 장광설을 늘어놓자 스파르타인들이 말했다. >"첫머리는 잊어버렸고, 나중 부분은 첫머리를 잊어버렸으니 듣지 않았소." >연설가가 길게 웅변을 늘어놓고 시민들에게 응답을 요구하자 그들이 말했다. >"가서 그대는 입 다물기가 어려웠고, 우리는 그걸 듣고 있기가 어려웠다고 보고하시오." >스파르타인들이 테베인들과 어떤 문제로 분쟁이 생기자 이렇게 응답했다. >"자존심을 덜 갖든가 힘을 더 갖든가 하시오." >페스시아 의 왕 크세르세스 는 레오니다스 왕 에게 서신을 보냈다. "모든 무기를 내려 놓으시오" >왕 레오니다스 가 답장을 보냈다. "[[300(영화)|와서 가져가 보시오]]" >어떤 자가 벌을 받으면서 "난 본의 아니게 죄를 저질렀을 뿐입니다."라고 울부짖자 스파르타인이 이렇게 이죽거렸다. >"그럼 벌도 본의 아니게 받게나." >한 스파르타인은 왜 단검을 쓰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적에게 가까이 갈 수 있으니까." >한 아르고스인이 "우리나라엔 스파르타인 무덤이 많소이다."하자, 스파르타인이 "우리나라엔 아르고스인 무덤은 하나도 없는데."하고 답했다. >이 말은 스파르타인은 아르고스에 여럿 발을 들여놓았지만, '''감히 스파르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던 아르고스인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테베인들이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인들을 격파하고 에우로타스 강까지 도달하자, 한 테베군이 잘난체하며 "스파르타인들은 다 어딨느냐?"했다. >그러자 포로로 잡힌 스파르타인이 옆에서 말했다. "여기엔 없다. 만약 있었다면 네놈들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테네]]인들이 도시를 넘겨주고 항복한 뒤, 사모스 섬은 자신들의 영토로 남겨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이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제 스스로를 소유하지 못하는 자들이 남을 소유하려 하느냐?"[*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거부할만도 했는데 시칠리아 원정 이후 아테네는 종속국들의 반발,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의 재전쟁, 자국내의 부유층들에 의한 쿠데타로 완전히 어수선해졌는데 이때에 '''사모스 섬'''에 주둔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와 아테네 내의 중도파가 합작하여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고 3차례의 해전을 통해 제해권과 종속국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았다. 비록 곧장 리산드로스에 의해서 다시 반격을 받고 패전 직전으로 몰리긴 했지만 페르시아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싸웠는데도 사모스 섬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일이 질질 끌렸으니 빡치긴 했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속담이 생겼다. >'''"제 스스로도 못 다스리는 자가 사모스를 다스린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만약에 내가 스파르타를 정복하면, 역사에서 스파르타의 흔적을 지워 버리겠다(ν μβάλω ες τν Λακωνικήν, ναστάτους μς ποιήσω)"라는 투로 협박했지만 스파르타인들은 "만약에(ακα)"라고 단 한 단어로 대꾸했을 뿐이다. 이는 '네가 만약에라고 한대로 말로만 떠들지 말고 싸워볼 테면 싸워봐라!' 또는 '너희의 말은 단지 만약(if)일 뿐이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한 것. 필리포스 2세는 이후 스파르타를 정복할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사실 필리포스가 스파르타에 대한 공격을 단념한 것은 그때 즈음에 스파르타가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지라 굳이 힘을 들여서 굴복시킨들 별 이득이 될 만한 것이 없는 깡촌에 불과했던 탓도 있다. 실제 이 주장은 친스파르타적인 플루타르코스의 주장이고 [[아리아노스]]는 필리포스 사후에 전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드는 상황에서 스파르타를 두고 (반란에 동참도 못하고) 조용히 분개하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결국 '만약에' 같은 무슨 패기 넘치는 상황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반란에 동참도 못하고 찌그러진 채 입으로 까불어봐야 무시나 당하는 게 당시 스파르타의 현실이었다.] >필리포스 2세가 "당신들 도시에 친구로서 들어가는 게 좋겠는가, 적으로서 들어가는 게 좋겠는가?"라고 서찰을 보내자, 스파르타인들은 간단히 이렇게 대답했다. "둘 다 싫다." * 스파르타인들은 군사 원정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극도로 꺼렸는데, 그 와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오니아 반란 당시 이오니아인들은 아테네나 다른 폴리스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에도 구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이오니아 사절은 스파르타의 왕에게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치면 막대한 돈을 주겠다."라고 제안했으나 씨도 안 먹혔다. 그러자 사절은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쳐서 당신네들의 용맹을 증명해보라."라고 은근히 도발했다. 페르시아인들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들은 스파르타인들은 귀가 솔깃해졌고 왕은 이오니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사신은 솔직히 "배를 타고 한 달 정도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파르타 왕 曰 "저 자를 내쫓아라! 스파르타인을 배 타고 한 달이나 걸리는 외국으로 내보내려 하다니!" 다른 폴리스들도 그랬지만 스파르타는 나라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걷는데 하루, 이틀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작은 폴리스였다. 식민지 비스무리하게 확보한 영토는 그리스 내에서 가장 넓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부 1/3 정도.[* 다만,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했다던 이탈리아의 타란토는 이런 사고 방식이 확립된 리쿠르고스 체제 이전에 건설된 경우라 위의 예시에 대한 반례로 상관없는 듯하다.] 물론, 진짜 이유는 군사 원정 간 사이에 노예들이 반란 일으키니까. 이 때문에 해외 교역은 대부분 제 2계급 몫이었다. * 전쟁은 막대한 물자와 돈을 소비하는 사회 활동이고 비록 메시니아 착취로 평등한 경제 평등은 이룩했으나 장거리 원정이나 전쟁이 길어질 경우 스파르타는, 그리스 부자들을 왕의 이름으로 초대를 빙자한 [[납치]]로 몸값을 받아내 전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 의외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널리 퍼져 있던 [[팡크라티온]]이나 [[권투]]는 스파르타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면 당시의 팡크라티온이나 권투는 1명이 죽거나 패배를 인정해야 시합이 끝났는데 '''스파르타인은 패배를 인정하면 안됐기 때문이다.''' 훈련으로는 행해졌지만 시합에 참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던 듯. * 스파르타 전사들은 각각 소년 하나씩을 데리고 다니며 전사 훈련을 시켰는데, 이것이 후세가 '동성애 관계'로 오해하면서 확대해석됐다. 또한, 여성들에게도 유사한 관계가 있어서 성인 여성이 소녀 하나씩을 데리고 당대 여성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 가르쳐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그리스인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과 붉은 옷을 입는 것을 게으름과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인들은 단 하나의 예외 폴리스만 빼고 모두 머리를 짧게 깎고 붉은 옷가지보단 흰 색이나 푸른 색, 자주색 옷을 선호했지만, 그 단 하나의 예외 폴리스가 바로 스파르타. '''우리는 머리 기르고 빨간 옷 입어도 이렇게 근면하고 강인하다'''라는 상징이었다나 뭐라나. 그래서 스파르타인이 페르시아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리스의 관습을 알고 있던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에 대해 게으르고 나약한 놈들이란 편견을 가졌다고 한다. 또 머리를 기르면 미남은 더 잘생겨 보이고, 추남은 무서워 보일거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스파르타 병사들은 전투 직전에 머리를 빗어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 전설과 역사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널리 퍼뜨린 인물은 아테네인이 아니라 '''스파르타 출신'''의 리쿠르고스였다. 이에 대해선 아래 각주로 소개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 참고.[* '이곳에서 그는 크레오필로스의 후손들이 보존해온 것으로 보이는 호메로스의 시들을 처음으로 보고 열심히 이것을 베끼고 정리하였다. 그것이 스파르타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국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호메로스의 이 서사시들은 이미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다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시를 일부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시를 최초로 만천하에 알려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리쿠르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리디아』] * 스파르타의 어머니가 전장으로 나가는 아들에게 방패를 건네주며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방패를 들고 돌아오거나, 들려 돌아오거라.( τν π τς)"[* Plutarch, Lacaenarum Apophthegmata(스파르타 여인들의 격언들), 241f. 영어로 직역하면 "Either this or upon this,"라는 뜻. [[300(그래픽 노블)]]에서는 [[레오니다스 1세]]의 왕비 [[고르고 왕비|고르고]]가 이 대사를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이 발언을 한 사람은 무명의 여인이라고.] 당시의 방패는 무거웠기 때문에 싸움터에서 달아나려면 방패를 버려야만 했다. 또한, 전사자의 시체는 방패에 눕혀서 가져오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어머니의 말은 싸움에서 자랑스럽게 이기거나 싸우다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이야기다. 이 격언은 로마시대 이후로도 스파르타를 포함한 라코니아 지방 전역에서 계속 구전되었고, 19세기 그리스 독립전쟁 시기에도 마니 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독립군 깃발을 만들면서 "승리 아니면 죽음"이란 구호와 같이 써넣기도 했다. * 트로이 전쟁의 중심이었던 절세 미녀 헬레네는 스파르타인이었다. 물론 이때의 스파르타는 미케네 문명의 일원으로 훗날 도리아인이 주요 시민 계층이 된 폴리스 스파르타와는 명백히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