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 (문단 편집) == 서구권에서의 역사적 평가 == [[제2차 세계 대전]]부터 [[냉전]] 시기를 경험한 현대인들은 아테네의 민주정만을 현대 정치 이론 및 체제의 모태로 보며,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모습이 강조되는 스파르타는 철저한 [[반면교사]]가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각으로 스파르타를 바라본 결과이다. 당장 [[고대 그리스]] 시기만 한정짓고 보더라도 아테네 내부에서조차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스파르타의 체제가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는데 최적이라고 보며 흠모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친스파르타적인 인물은 아니었는데, 제자 플라톤으로 인해서 친스파르타적인 이미지가 덧칠해졌다는 견해가 오늘날 들어와서는 대두되고 있다. 진정으로 스파르타를 흠모한 인물은 플라톤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스파르타 사회 제도의 [[군국주의]]적인 요소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게다가 로마 공화정의 몰락 이후 17세기 중후반 [[계몽주의]]가 대두되기 전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부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역사 속에서 잊혀진 정치 체제는 스파르타의 과두정이 아닌 아테네의 민주정이었다. 군국주의적인 문화와 별개로 스파르타의 정치/사회 체제는 유럽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 과두정이 바로 스파르타를 롤 모델로 한 것이었으며 영국의 [[입헌군주제]] 역시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스파르타 체제를 당대 영국 사회의 현실에 맞게 손질한 결과였다. 이튼과 같은 영국의 명문 사립 학교들의 커리큘럼 역시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모방하고 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영국 사립 학교들의 이런 커리큘럼이 대차게 까이고 있긴 하다. 어쨌든 [[19세기]] 당시 학교 측에는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모방한 것은, 당대 사회가 스파르타식 교육을 올바르고 건전한 시민을 육성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는 방증이다. 또한 [[계몽주의|계몽주의 사상가]]들 역시 스파르타의 공평한 토지 분배, 시민군, 공동체 생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당연히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 내에서도(특히 [[생 쥐스트]]) 스파르타를 가장 이상적인 [[평등주의]] 사회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초기 [[시오니즘]]을 주장한 [[유대인]]들 중에서도 스파르타 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인 [[키부츠]]도 스파르타 모델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The Making of Israeli Militarism》 By Uri Ben-Eliezer, Indiana University Press, 1998] 실제로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에 오히려 급격히 몰락했다는 사실 또한 비교적 현대에 재조명되어 널리 알려진 부분이 있다. 20세기 초에 발간된 역사 서적들만 해도 스파르타의 어이없는 몰락에 대해선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