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 (문단 편집) === 패권 속의 어둠 === 그러다 보니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테베]]나 [[코린토스]]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걱정해 완전히 멸망시키진 않았다. 대신, 친스파르타 정치인들로 이루어진 과두정을 패배한 아테네와 그 동맹국에게 강요했다. 아테네 밑에서 [[민주주의]]를 맛보다 느닷없이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의 [[독재]]를 겪어야 했던 시민들은 이에 심하게 반발했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 당시 때, 아테네 제국이라며 깠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상은 달랐다. 각 도시 국가들의 귀족층들이 스파르타의 과두정을 지지했어도, 그 밑의 중산층과 하층민들은 아테네가 만든 민주정을 흠모했다. 이는 현대 사람들이 포퓰리즘의 원조라고 까는 페리클레스가 하층민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기에 지지층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거기다 비록 아테네가 패배했어도 아테네가 남긴 민주정은 중하층민들에게는 여전히 흠모의 정치체계였다.] 게다가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은 민주주의자를 죽이는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에 반감은 더욱 심해졌다.[*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해버렸다. 그런데 이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은 애초 전쟁 내내 트롤짓을 일삼으며 아테네의 발목만 잡아댄 작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매국노]]가 정권을 잡은 셈이다. 이러니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그래서 아테네는 항복한 뒤, 단 1년 만에 스파르타에게 반기를 들어 스파르타가 세운 30인의 독재정부를 엎어버리고 민주주의로 되돌아갔다. 아테네를 따라 곳곳에서 과두정이 붕괴됐으나, 스파르타는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패권국 스파르타가 가진 문제는 이렇게 각처에서 반기를 드는 폴리스들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파르타군은 분명 당시 그리스 최강이었으나 1만 남짓의 '''소수''' 정예였기 때문에[* 그나마도 핵을 이루는 스파르타 완전 시민의 숫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3천 명, 레욱트라 전투 당시에는 1천 명 정도만 남았다. 나머지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편입시킨 여타 계급.]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수가 너무 적었고 게다가 이러한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외부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내부의 헤일로타이라는 노예 계급 때문에 불가능했다.[* 스파르타 제1계급의 10배 가까운 노예가 있는 데다가, 이들 노예들은 온갖 학대와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스파르타를 증오하여 기회만 되면 들고 일어나려 했다. 더욱이 이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자유를 약속해놓고 뒤통수를 쳤으니 헤일로타이들이 스파르타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는 아테네라는 명백한 적수만 상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마치 현대 미군이 소수의 보병으로 이라크 전쟁을 이긴 뒤 전후 처리에 골머리를 썩혔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더군다나 미군 같은 경우에는 그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스파르타의 경우에는 국가체제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식이나 국부를 모으는 방식의 한계가 명확해서 규모의 도약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오히려 도시국가 규모의 군사력에서 장기적으로는 감소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전체를 움직였지만, 스파르타군처럼 마음대로 장기 주둔시킬 수는 없었다. 일각에서는 전장에서 스파르타군이 좌익에 서고 우익에 동맹군을 몰아넣어 피해를 강요했다고 주장했었는데 이는 스파르타에게 억울한 일이다. 당장 좌익이 상대하는 것은 적의 정예병인 우익이다. 즉, 좌익에 당대 그리스 최강 육군으로 대표되는 스파르타군이 있다는 건 적이 우익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뜻이 되고 이는 아군 우익의 포위 위험은 줄어들고 우익은 더 수월하게 적의 좌익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설사 밀리더라도 좌익의 자신들이 적의 정예를 붙들며 버틸 테니 그 사이에 우익의 동맹군은 철수하라는 신호가 된다. 그리고 전장에서 공을 더 세울 수 있는 건 당연히 공격을 하는 우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동맹군에게 공을 어느 정도 양보하겠다는 의도도 있기에 스파르타가 좌익에 섰다는 것으로 까는 건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자신들의 외교적 실책으로 동맹의 신뢰를 잃은 건 사실인데 아테네를 이기기 위해 페르시아와 연합해 해군을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받았기 때문. 이는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서로를 보호한다는 그리스 연합의 명분을 망각한 짓이었고 이것 때문에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그리스 연합의 존재 이유가 불분명해졌으므로 그리스계 폴리스들은 스파르타가 단지 그들의 야욕 때문에 그리스 연합을 유지하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과거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델로스 동맹처럼 자발적인 연합이 불가능했다. 아테네가 패배한 뒤, 스파르타 휘하의 그리스 연합은 매우 불안정했다. [[델로스 동맹]]을 이끈 아테네는 그들 자체가 동맹국 중 가장 [[인구]]가 많고[* 전성기 아테네의 인구는 30만~35만이었다.] 부유했으므로 여러 가지 해외 원정도 하고 수백 척의 전함을 끌고 다니면서 문제를 처리하는 등 맹주 노릇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지만[* 전성기 아테네는 '''단독으로''' 함대를 최대 200여 척 이상, 또는 중보병 2~3만을 움직일 수 있었다.] 스파르타는 오직 중보병 군사력에만 의존하던 가난한 국가였기에[* 그나마도 이 군사력조차 지속적으로 수가 줄어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단독으로 1만여 명을 동원할 수 있다던 중보병 중에서도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은 이 무렵엔 3천 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런 프로젝트를 가동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전함을 보유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했는데 노잡이만 해도 수만 명이고 함선을 건조하고 유지하는 비용도 무지하게 비싼,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줘야 할 정도로 당시 해군은 무엇보다도 비싼 존재인데, 사치를 배척하며 독선적인 데다가 인구를 늘릴 생각도 안 하고 강한 전사만 키우려고 아기를 절벽으로 떨어뜨리거나 내다버리는 스파르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다른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더불어 스파르타의 무용담이 무색하게도 정작 중요한 전투에는 불리하다 싶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발뺌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라톤 전투]]와 [[테르모필레 전투]]였다. 둘 다 그리스 동맹국들은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대를 막기 위해 육군 최강국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작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마라톤 때에는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고 [[테르모필레 전투]] 때는 주전파 국왕이 간신히 300명만 끌고 왔다. 그들이 자랑하던 라코닉(laconic) 화법도 제일 잘 써먹을 때가 군사적 책임을 회피할 때였다. 그렇다고 스파르타가 딱히 종교적인 국가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리스에서 [[올림피아 제전]] 기간에는[* 운동 경기로 유명했지만 원래 목적은 [[제우스]]에게 바치는 종교 행사다.] 그리스 모든 폴리스가 휴전하는 것이 규칙이었는데, 이를 어긴 유일한 국가가 스파르타다.[* 출처: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즉 자기 아쉬운 대로 몸을 사리던 것. 이런 행보 때문에 다른 그리스 동맹들까지도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었다. 또한 전과에서도 스팍테리아 전투나 레욱트라 전투 등 굴욕들이 있다. 게임에 비유하자면 스파르타의 전투력은 '조건이 비등하다면 보다 안정적인 전과를 낼 수 있는 엘리트 병종'이지, 수적 열세나 조건의 불리함을 씹어먹고 적에게 비장의 카드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영웅급 전력'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 병사들이 잘 싸우는 자가 있고 상대적으로 못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에 비해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아무리 못 싸우는 자라도 최소 타국의 숙련병 정도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팀워크와 그에 복종하는 정신무장을 훈련하는 것이지 무슨 단독무쌍 초인 양성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파르타나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이나 최상급의 전사들로 가면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역사를 찾아보면 스파르타가 이름값을 그다지 못 하고 패배한 전투들도 흔하다. 물론 그렇다고 스파르타의 군사력이 아주 거품이라거나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투퀴디데스]] 등 동시대인들은 스파르타군을 분명히 헬라스 최강의 강군으로 인식하고 있는 마당에, 2500년 후의 후대인들이 스파르타의 군사적 굴욕들을 채굴해서 거품이라 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기록들을 채굴하면, 천하의 [[미군]]도 희대의 [[당나라 군대]]로 왜곡할 수 있다.] 그리고 [[마라톤 전투]] 등에서의 소극적 대응도, '외교'라는 면에서 보면 차라리 교활하다고 욕할 순 있어도 겁쟁이라 욕할 순 없는 것이다.[* 아무리 페르시아 전쟁이 범헬레네스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고 하더라도, 폴리스는 엄연히 하나하나가 국가이다.] 상식적으로, 국제 전쟁에서의 소극성은 외교적 신뢰의 문제이지 용감하고 겁 많고의 문제는 당연히 아니다. 요컨대, 영화 300 같은 과장된 스파르타 전사 이미지는 분면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스파르타군에 보낸 찬사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맹주 노릇을 하며 일군 문화와 사상, 사치에 버금갈 재산 등이 축적되어 퍼지자, 경제적인 사치를 오랫동안 접하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오히려 아테네의 문화에 점점 빠져들어 초심을 잃었다. 특히 아테네가 민주정을 계속 나아갔던 반면, 스파르타는 과두정이라는 정치체계와 동맹국들 간 신임을 깨뜨리고 아테네보다 더한 행패를 부렸다. 결국 동맹국들도 반발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오랫동안 문제시되었던 메세니아와 같은 지배한 국가 시민들에 대한 불평등이라는 내부적인 문제로 멸망을 자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