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 (문단 편집) ==== 군사적 원인 ====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기존의 중보병 개개인의 전투력보단 전술의 중요도가 커지면서 스파르타처럼 굳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병사 하나하나를 인간병기로 만들 필요성이 없어져 갔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고집스럽게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안 받아들이다가 결국 레욱트라 전투에서 그 대가를 치렀다. 당시 테베인들은 스파르타 식의 훈련과는 거리가 먼 시민들이었기에 개개인의 전투력 수준은 스파르타인들에 비해 떨어졌다. 하지만 단지 좌익에 물량을 집중한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로 테베군이 스파르타군의 우익을 붕괴시키고 배후로 돌아 협공함으로써[* 원래 사선대형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 한쪽에 병력을 몰빵한 것이다. 사선대형임을 간파당하지 않았을 때는 강한 진영을 통해서 상대의 한쪽 진영을 박살내고 약한 진영과 협공해 적을 무찌를 수 있지만, 적이 이 사선대형을 간파하면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서 약한진영부터 무너뜨리는 전략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스파르타군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테베도 신성부대만큼은 스파르타에 필적할 정도로 훈련을 받았지만, 그 숫자는 최대 300명에 불과했다.[* 의외로 테베도 자신들을 용에서 나온 전사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여 군사적인 면이 있었고, 아테네도 강력한 해군과 해적질, 식민 도시 건설로 이름 높았다.] 더구나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왕인 클레옴브로투스(Cleombrotus)가 죽든 말든 지들끼리 도망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하는 둥 이미 몰락하고 있었다. 본래 스파르타의 법률이면 이들을 다 처형해야 했으나, 극심한 인구 감소에 시달리던 당시 스파르타는 도망자 처형 법률을 시행하지 않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이미 막장이었다.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남은 시민이 3000명, 이 수준이니 100명의 목을 쳐도 전 시민의 3%의 목을 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고대 이래로 스파르타의 성인 남성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폐쇄적이고 가혹한 사회구조를 유지하다 보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주민은 없고, 받아주지도 않았고[* 스파르타 역사상 스파르타 시민권을 얻은 외국인은 고작 5명에 불과했다.], 영아 살해와 유기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끝없는 전투로 계속 인적 자원이 소모되며, 워낙 비싼 아고게 비용을 감당 못해서 두눈 시퍼렇게 뜨고 시민권이 박탈되어버리는 일도 빈번했기 때문에 시민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테베에게 패배할 무렵, 스파르타 중보병의 핵심인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숫자는 페르시아 전쟁시의 10분의 1 정도인 1천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전설적인 스파르타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나머지는 이런저런 편법으로 끼워넣은 다른 계층의 구성원들이었다. 주로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에서 몰락한 반자유민(페리오이코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