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리아-레바논 (문단 편집) == 역사 ==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18년]], [[파이살 1세|파이살(Faisal I of Iraq)]][* 훗날 [[이라크]]의 국왕이 됨.]이 이끄는 아랍 군대가 영국군의 지원 아래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시리아 지역을 탈환한다. 이후 프랑스, 영국은 '점령 적지 행정부(Occupied Enemy Territory Administration, OETA)'를 수립하고 구 오스만 제국 영토를 분할하여 군사통치를 시작하였다. [[1919년]],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파리 강화 회의]]를 개최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 분할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파리 강화 회의를 통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다. [[1920년]] 3월, 파이살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입성, [[시리아 아랍 왕국]] 수립을 선포했으나 시리아를 자국의 권리로 간주한 프랑스의 진압으로 무산되었다. 동년 [[4월 25일]], [[국제연맹]]은 시리아-레바논 지역을 프랑스의 [[위임통치|위임통치령]]으로 설정하였다. [[8월 10일]]에는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이 체결되면서 시리아-레바논 지역은 완전히 프랑스의 [[위임통치|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여러 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1925년]]부터 [[1927년]] 동안 프랑스의 통치에 대한 반발로 시리아-레바논 지역 드루즈인들과 베두인인들의 봉기가 여러차례 발생하였다. 드루즈인들이 주축이 되어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를 드루즈 반란이라고 부른다 초반에는 시리아 남부 알 마즈라아 전투에서 500명의 기병대로 편성된 드루즈-베두인 연합이 기관총부대, 포병대, 장갑차부대, 기병대, 식민지군으로 편성된 3500명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리를 거두는 전공을 세웠다. 비록 프랑스군의 삽질이 더 컸지만 영국처럼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고 나름 강대국 취급을 받았던 프랑스군을 이겼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시리아-레바논 지역의 드루즈인들과 베두인인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기 때문에 봉기는 프랑스의 진압으로 좌절되었고 반란을 일으킨 지도자 중 1명인 하산 알 카랏도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전간기]]에 [[하타이|하타이 지방]]이 [[터키]]에 반환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패해 시리아-레바논 지역은 [[추축국]]의 영향권이 되었다. [[1941년]],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시리아-레바논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드골은 시리아-레바논 지역에 전쟁 협력을 요청하고 대신 [[위임통치]] 종료 및 독립 국가 수립을 약속한다.[* 하지만 시리아의 독립에 대해서는 식민지로 만들자는 프랑스 군부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1945년에 영국이 말릴 정도로 프랑스가 레반트 위기를 일으켜 통수 치려고 했다] [[1943년]] 레바논이 독립한 데 이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하고 이듬해 [[4월 17일]] 시리아가 독립하면서 시리아-레바논은 해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