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황제 (문단 편집) == 여담 == *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나름 유명하다. 흔히 불리는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라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일 뿐이다.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이세황제|호해]]가 이세황제(二世皇帝)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한 후 [[전한]] 시대에 시호를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멸망 이후 쓰이지 않았던 [[묘호]]까지 부활시켰다. 황제라는 칭호는 이미 유용성이 입증됐다고 봐서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진나라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통일 제국에서 다시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전국시대로 회귀하려고 했던]] 복고주의자 항우도 [[초의제]]를 세우는 등 황제 칭호를 버리지는 않았다.] * 시황제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s-2]]·양한[* 중국의 [[전한]]과 [[후한]] 두 [[한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시황제와 [[무제(전한)|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 《[[사기(역사책)|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당대의 황제인 한무제를 까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시황에 한무제를 덧씌운 정황이 있는 것도 이러한 표현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사기》의 진시황의 폭정 묘사는 한무제가 일으킨 대규모 토목 공사와 비슷하다.] 어차피 진나라의 2세 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재위 기간도 짧아 따로 언급할 일이 적고 그 다음 군주인 [[영자영|자영]] 역시 한 달 조금 넘게 재위한 데다 아예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왕을 칭했다.[* 다만 후대인들이 영자영을 3세 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긴 하다.] 따라서 시황제가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물론 진황한무(秦皇漢武)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秦皇漢武)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황후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을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전국시대)|이사]]가 17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릉]]에 대한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다. >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皆令從死, 死者甚眾) 여기서 선제는 당연히 시황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나 후궁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 후궁의 시신이 매장되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저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 시황제는 [[절대권력]] 확립에 집착해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일 중독|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 가량이었다고 한다]].''' [[여불위]]의 섭정과 [[노애]]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 탓으로 추정된다. * [[폭군]]인 것 치고는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없는 편인데 의외로 진시황은 의심이 많았어도 숙청 자체는 그리 쉽게 단행하지 않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초기엔 여불위를 날려버린 본인의 정치력이 있고 후기엔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업적이 있으니 반기를 들 신하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하들 관련 문제가 두드러진 건 실제로 시황제 사후부터였다. *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자랑스럽게 "우리는 단언컨대 진시황보다 강력하다."고 했으며, 1973년 7월 [[왕훙원]]과 [[장춘차오]]에게 "나 또한 진시황이다."라고 교시했다. [[린뱌오]]의 몰락 이후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자신이 진시황이란 이유로 비판했다고 그를 부관참시하면서 린뱌오는 [[장제스]]처럼 [[공자]]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한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린뱌오 사망 이후 [[저우언라이]]의 권위가 상승한 것에 매우 불만이었던 문혁 극좌파는 신이 나서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위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에 대한 [[4인방]]의 패악질은 오히려 중국 전역에 방광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저우언라이의 상황을 알리게 되었으며 4인방과 마오쩌둥에 대한 민심은 악화되고, 저우언라이의 인기가 올라가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 현대 한국에서는 [[시진핑]]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시진핑/행보#s-1.4|주석 집권 후 지배력을 강화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바람에 '''시'''씨 성의 '''황제''' 또는 "'''진'''짜 '''시'''진핑 '''황제'''가 되었다."는 뜻. 이 표현은 [[연합뉴스]]에서도 쓰인 바 있다.[* 하지만 시황제의 시는 [[始|비로소 시]](始, 중국식 발음은 권설음이 들어간 스)자인 반면 시진핑의 시(Xí)는 [[익힐 습]](번체 習/간체 习)자의 중국 발음이다.] * 중국 [[화남#s-2]] 지역 전체가 중국 통일 이전엔 모두 [[베트남]] 문화권이었다고 주장하는 베트남판 [[환빠]]들에게는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베트남]] [[극우]]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현대 [[베트남인]]의 선조 격인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 민족만 살았던 게 아니라, [[묘족]]이 속한 [[몽몐어족]] 계통 민족들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민족들, 그리고 [[태국인]]과 [[라오인]], [[좡족]]의 조상 민족인 [[크라다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마구 뒤섞여서 살았다. 그래서 백번 양보해서 베트남 [[환빠]]들 말대로 중국 남부 전체가 베트남계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고 쳐도, 실상은 [[중앙집권제|중앙집권화]]가 전혀 안 되어서 [[춘추시대|수많은 민족과]] [[고조선|부족들이]] [[전국시대(일본)|각자 다른 나라인양]] [[신성 로마 제국|따로국밥으로 노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 [[정약용]]은 재물이나 땅 문서를 믿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 때 진시황 이야기를 했다. * [[쵸소카베 모토치카]], [[쵸소카베 모리치카]] 등으로 유명한 [[센고쿠 시대]]의 [[쵸소카베]] 가문이 진시황의 후손을 자칭했다.[* 실제로 모토치카는 서장을 작성할 때 [[미나모토]], [[타이라]] 같이 자신의 성씨를 쓰는 곳에 [[하타]](秦)라고 기입했다.(그러나 하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시황의 후손이라는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헤이안 시대]] 하타 요시토시(秦能俊)라는 인물이 그 선대가 하사받은 시나노의 땅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1156년 호겐의 난(保元の乱) 때 패배한 세력에 소속해있었기 때문에 토사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다른 학설로 "1221년의 죠큐의 난(承久の乱) 이후로 도망쳐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렇게 토사로 도망쳐온 요시토시는 [[토사]]에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 평야 지역이자 중심 지역이나 다름 없는 나가오카 군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의 성을 '소카베'(宗我部)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옆동네 카미 군(香美郡)에도 자신들의 성을 '소카베'라고 쓰는 일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쵸소카베(長宗我部), 카미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코소카베(香宗我部)라 부르게 되었다.] * '''유능한 [[정복군주]]이면서 말년에 [[암군]]으로 타락했다'''는 점에서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와도 비슷한데 '''초반에 유능한 [[정복군주]]였다가 말년에 지나친 광신으로 피지배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하여 사후에 제국이 분열됐다'''는 점이 그러하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비슷한데 '''[[전국시대|전국]][[전국시대(일본)|시대]]의 혼란으로 시달리던 자국을 통일한 점은 높이 평가받지만 이후에 엄청나게 타락하여 결국 자기 가문의 정권[* 진나라, 도요토미 정권]이 본인 사후 빨리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으로 평가받는 점이 유사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