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돈 (문단 편집) === 사망 ===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韌)이 신돈(辛旽)이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에 성과 이름을 숨겨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칭한 뒤 글을 적어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졌다. 김속명이 이를 아뢰자 왕은 신돈의 일당인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정구한(鄭龜漢)·진윤검(陳允儉)·기중수(奇仲修) 등을 체포하여 주살할 것을 명하였다. > >왕은 성품이 의심이 많고 잔인하여 비록 심복이 되는 대신(大臣)이더라도 그 권세가 왕성해지면 반드시 꺼리다가 처형하였다. 신돈은 스스로 권세가 매우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왕이 그를 꺼릴 것을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다. 왕이 헌릉(憲陵)과 경릉(景陵) 2개의 능묘를 배알할 때 신돈은 그 일당을 나누어 파견하여 길가에 매복시킨 뒤 큰일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자, 신돈은 그 일당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약속대로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그 일당이 말하기를, “상(上)의 의식에 참여한 호위병이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 차마 범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돈은 화를 내고 또한 욕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실로 겁쟁이에 나약하고 쓸모없는 자들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로부터 밤낮으로 모여 공모하면서 다시 날을 잡아 일을 치르기로 하였다. > >당시에 관직을 구하는 자들이 모두 신돈에게 붙자, 이인은 신돈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흉악한 모의를 갖추어 알고는 몰래 장부에 그들을 기록하였으며, 일이 임박하자 갖추어서 변란을 아뢰고 곧 미복(微服) 차림으로 도망갔다. 왕은 처음에 이인이 무고하여 꾸몄다고 의심하여 그를 믿지 않았으나, 신돈 일당을 체포해서 국문하자 모두 증명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신돈을 수원(水原)에 유배 보내었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가 일찍이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라고 하였다. 선견지명을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근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여종을 총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놀라게 하지 말고 그를 잘 보호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들은 바로 모니노(牟尼奴)이다. >---- >《[[고려사절요]]》, 공민왕 20년(1371) 7월 -반란을 도모한 신돈을 유배보내다- 결국 신돈은 공민왕에게 숙청당하기 전에 왕을 시해하여 선수를 치려다가 자신의 밑에서 문객으로 지내던 선부의랑 이인의 고발로 실각당했으며, 역모죄로 [[유배]]를 떠났다. 이후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지 5년이 채 안된 1371년, [[수원시|수원]]에서 처형당했다. 사실 일련의 사태에는 왕을 제거하려 했던 반역 행위도 심각했지만 축재와 부정부패도 문제가 많았다는 견해가 다수다. 신돈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의 [[지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흠결과 약점을 너무나 많이 노출했다. 무엇보다 왕의 총애로 권력을 얻게 된 이상 자신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인지하고 왕의 의중을 파악하며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명백한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신돈도 이를 처음부터 경계했는지 첫 만남 때 >"대왕께서는 참언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여 절대로 죄 주지 않겠다는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라." 라는 맹세문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할 때 신돈이 스스로 맹세를 어겼다고 직접 그에게 언급했다. >처음에 왕이 신돈·이춘부(李春富) 등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박에게 맹서(盟書)를 주면서 신돈에게 보여주어 죄를 헤아리게 하며 말하기를, > >"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기운을 이끌어다 기를 기르는 것일 뿐,[* [[탄트라]] [[밀교]](특히 좌도밀교)의 수행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 기록을 참고했는지 [[신돈(드라마)]]에서도 신돈이 티베트로 가서 수행하는 장면이나 [[금강저|금강령]]을 흔드는 장면 등을 넣기도 했다.] 절대 사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나 지었으니 이런 것도 맹세문에 적었던가? 이러한 작태가 몇 건에 이르니 죄상을 다 따진 뒤에 이 맹세문은 불에 태워 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반역 열전> -신돈- 《고려사》의 기록을 따르자면 공민왕은 신돈의 부녀자 간통과 축재에 큰 배신감을 느낀 듯하며, 이로 인해 숙청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돈이 처형되고 나서 공민왕도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측근들인 자제위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다. 신돈의 좌절된 개혁은 사실상 고려 왕조 [[최후]]의 개혁 시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이후 [[정권]]을 잡은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일파는 즉시 신돈 일당의 죄를 [[사면]]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으로 전락하며 가뜩이나 망조가 짙던 고려를 더욱 심연의 구렁텅이로 빠뜨려버렸다. 다만 신돈이 성균관에서 지원한 신진사대부 중 급진파 일원들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기가 아끼는 [[여종]]이었던 [[반야(고려)|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고 반야에게서 '모니노'[* 훗날의 [[우왕]]]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태조(조선)|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의미로 '신우'와 '신창'이라고 부르며 《고려사》 <반역 열전>에 넣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여불위]]와 비교되기도 했다.] 우왕은 조선 건국의 정당화를 위하여 계속 매도될 수밖에 없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 500년 내내 '신우'라고 불렀다. 조선이 망해 우왕과 창왕이 [[왕(성씨)|왕씨]]냐 [[신(성씨)|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는 [[혈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돈, 우왕, 창왕은 반역자로 취급받아 [[무덤]]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이라도 있다면 유골을 통해서 [[유전자]] 감식이라도 해볼 수 있다.] 이성계 일파의 모함으로 여겨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