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한반도 외교 === 한반도 내의 외교관계 중 태봉와의 관계는 [[궁예]]의 [[태봉]]국이 시종일관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포로 학살|모두 죽였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해왔던 만큼 [[교류]]는 사실상 없었다. [[태봉]]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태조(고려)|왕건]]의 [[고려]]는 비교적 [[신라]]를 떠받들어주고 시종일관 존중하며 우호적으로 대한 편이었다. 다만 [[신라]]가 여력을 완전히 잃고 [[서라벌]]로 축소된 시기에 가서는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자세한 부분은 [[고려-신라 관계]] 문서 참조. 후백제와의 관계는 [[견훤]]의 [[후백제]]도 내내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나 경애왕을 잔혹하게 처단한 사례 때문에 극단적인 반신라파로 여기기 쉽지만, 의외로 [[신라]][[왕]]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과 [[태조(고려)|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이나마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제(帝)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애왕 처단 후 그것이 신라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김씨 왕 경순왕을 다시 세운 것도 견훤의 목적이 무조건적인 반신라정책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후백제 건국 초반 얘기다. 후백제의 견훤이 무슨 짓을 하든, 신라 왕실은 본디 신라 왕실 근위대 장교를 역임하기까지 했던, 게다가 신라 왕실의 직속 왕령지 출신인[* 견훤의 출신지인 옛 사벌국 영역인 추풍령 일대는 지증왕, 진흥왕, 진평왕 등이 진골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속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투자와 관심을 기울인, 말하자면 신라 성골 왕실의 개인 왕령지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물론 이 일대에 대한 영향력은 무열왕계 왕실이 그대로 승계했다. 신라 왕실 근위대장 자리는 진골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대대로 진골은 결코 임명될 수 없는 자리였고, 물론 그 장병들도 전원 견훤처럼 신라 왕실이 직접 육성한, 진골 및 6두품들과는 무관한 직할지들(추풍령, 죽령)로부터 자원 입대를 받았다.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 견훤이 다름아닌 신라 정규군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백제란 나라를 부활시킨 행태는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신라 왕실이 고려와 후백제에 대한 외교에서 상당히 태도가 달라졌고, 이에 견훤은 가망이 없다 싶었는지 무력으로 신라 왕실을 굴복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이후 후백제와 신라 사이의 관계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가 없다시피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