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마적 (문단 편집) == 상세 및 생애 == 출생년도는 미상. 평양 출신으로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확인된 바 없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도쿄]]에서 유학한 엘리트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유학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다. 도쿄 내 명문대학 중 한 곳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포악한 성격과 반대되게 유창한 일본어와 만주어를[* 이 시대 문맥에선 표준중국어, 즉 관화를 뜻하는거지 청나라 애신각라조 그 만주어 말하는거 아니다.] 구사했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술에 취하지 않았을때는 상당한 달변가였다고 한다. 1930년경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평양 대신에 서울로 상경하여 직장을 구하려고 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해, 본인이 원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성격이 포악해졌다고 한다. 그는 건달이 되어 횡포와 폭력을 일삼던 중, 당시 종로2가에 있던 YMCA를 배회하다가 YMCA 학생주먹패거리들과 시비를 붙게 되고[* 엄동옥의 측근이었던 인물의 증언에 따르면 술을 좋아했음에도 운동을 거르지 않을만큼 운동광이었다고 한다. 학생주먹패들과 시비가 붙은 이유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Y의 체육관에 들렀는데, 당시 Y회원이 아니면 이용을 할 수 없었음에도 엄동옥은 '같은 조선인 끼리 그럴거냐'며 되려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다.] 엄동옥은 시비끝에 학생주먹패 몇명을 패다가 학생주먹패 2인자인 갈치[* 본명은 이민규. 한성권보 출신으로 해학기의 고향 친구다.]라는 인물을 때려눕힌다. 이 소식을 접하고 나타난 학생주먹들 중 1인자였던 해학기[* 당시 YMCA 운동부와 학생 주먹패의 보스였던 인물로써 별명이 살인주먹이라 불렸다. 그도 신마적에 뒤지지 않는 기골이 장대한 거한인데다 이름난 권투선수 출신으로 [[김기환]]과도 인연이 있었다. 실제 YMCA 학생 주먹패는 숫적으로는 구마적 패거리들보다 더 많았으며 해학기는 구마적의 부하들 중 그의 최측근의 간부급 강자 몇몇을 쓰러뜨린적이 있어 당시 천하의 구마적도 학생주먹패를 눈엣가시로 여겼음에도 섣불리 건드리질 못했다.]마저 쓰러뜨리고 엄동옥은 YMCA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해학기와 갈치는 엄동욱의 부하가 되었다.] YMCA 학생주먹패들 중 엄동옥의 측근이었던 인물의 증언에 의하면, 6척(182cm[* 당시 척 단위가 30.3cm니까 계산하면 182cm가 나온다.]) 장신으로 구마적과 비슷했다고 하며 엄청난 거구였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거구인데도 험상궂게 생긴 구마적과는 달리 신마적은 전성기때 조선 여학생들 여럿이 흠모할만큼 미남이었다. 그는 상당한 유도 실력자에 씨름까지도 잘 했으며, 무엇보다도 구마적 이상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괴력으로 유명했다. 그도 구마적 처럼 맨손으로 잣을 으깨고 호두껍질을 손가락으로 깨부수며, 성인남자 두세명이 달려들어도 못드는 역기를 단숨에 들어 올리는 괴력을 지녔다. 이에 못잖게 주먹실력도 엄청났지만, 실제 엄동옥의 특기는 이 엄청난 괴력을 동반한 유도와 씨름기술로 사람을 패대기 쳤다는데, 실제로 그와 싸운 상대들이 그에게 던져져 반신불수가 되는 모습들을 목격한 당대 싸움꾼들의 증언이 다수 있을 정도였다. [* [[https://plisten.tistory.com/42|출처]]] 엄동옥은 이 엄청난 괴력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신마적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렇게 불리게 된 것에는 정확한 증거들은 없고 여러가지 설들만 있다. 그 중 널리 알려져 있는 팔씨름 승부 설인데, 평소 해학기가 군림했던 YMCA 학생주먹패들을 곱게 보지 않았던 구마적이 그 해학기를 꺾고 YMCA를 장악하고 더 활개치고 다니는 신흥 강자인 엄동옥과 우연히 술집에서 조우하게 됐는데, 서로 팽팽한 긴장이 오고가던 중 구마적이 먼저 맞짱 대신 팔씨름 한번 겨뤄보자고 한 뒤, 팔씨름에서 진 구마적이 그를 새로운 마적의 탄생이라며 신마적이라 부르게하고 의형제를 맺게 되었다는 설이다.[* 또다른 설은 신마적이 실제로 구마적과 맞짱을 떠서 팽팽한 접전끝에 승리를 거두었다는 설도 있다. 허나, 팔씨름 승부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있는 설이다.][* 실제 YMCA의 학생주먹패들에는 운동부원들도 있어 단순 세력으로 치면 우미관 주먹패들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고 둘다 패거리들이 보는 앞에서 누구하나 맞짱에서 지면 잃는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후일 구마적을 이긴 김두한에게 패배한 뒤 부하인 해학기와 갈치를 포함한 몇명과 함께[* 엄동옥은 김두한에게 패배 후 3개월간 입원해있었고, 그가 입원한 뒤 YMCA 학생주먹패는 자연스레 해체되어 버렸다.] 만주 봉천으로 건너가서 봉천에서 주점을 하던 절친의 주점 경영을 돕다가 만주의 조직폭력단의 간부가 되어 만주에 있던 일본 야쿠자들을 제압하며 그곳에서도 건달 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당대에 유명했던 여러 폭력배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사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김두한]]은 [[1972년 11월 21일]]에 고혈압으로 사망, [[김기환(조직폭력배)|김기환]]은 1949년 7월 20일에 암으로 사망했고, [[구마적]]은 196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흔히 하야시로 알려진 [[선우영빈]]은 1978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이화룡]]은 1984년 2월 24일에 고혈압으로 사망했으며, 마지막으로 시라소니로 알려진 [[이성순]]은 1983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다만 신마적과 함께 있었던 부하의 증언에 따르면 만주에서 해방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건너 갔는데 그 뒤 6.25 사변으로 해학기를 포함한 부하 4명이 공산당원들에게 사살당했고, 이 증언을 한 부하가 엄동옥에게 함께 남한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평양에 남았다고 한다. 그 뒤 생사여부가 확인이 안 됐고 1961년경 평양에서 병사했다는 얘기도 들었으나 이것 역시 확인된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