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미양요 (문단 편집) === [[광성보]] 전투 === [[파일:광성보 전투.jpg|width=600]] 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은 6월 10일에 상륙해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했다. 당연히 조선군도 바보는 아니었고 병인양요때 겪은 서양의 압도적인 화력을 상대하기 위해 내륙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러한 전략의 일원으로 덕진진과 초지진 모두 미군이 상륙했던 시점 조선군은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조선군은 야음과 해안가를 따라 행군하는 미군의 좌측방의 산악지대를 활용해 게릴라 공격을 펼쳤지만 짧은 조총의 사거리로 인해 피해를 전혀 주지 못했다. 다만 미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조선군을 고스트 아미라고 부르며 상당히 거슬렸했다고 한다. 조선군의 산발적 저항을 받던 미군은 앞서 병인양요에도 참전했던 어재연 장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미국의 전력 및 피해를 비교해 보면 ||'''미군''' [[군함]] - USS Colorado(1856년 건조 / 3425톤 / 10인치 포 2문, 9인치 포 28문, 8인치포 14문) - USS Alaska(1868년 건조 / 2,394톤 / 11인치 활강포 1문, 60파운드 포 1문, 20파운드 포 2문) - USS Palos(1865년 건조 / 420톤 / 포 2문) - USS Monocacy(1864년 건조 / 1,370톤 / 13인치 구포 1문, 32파운드 포 2문) - USS Benicia(1868년 건조 / 2,400톤 / 11인치 활강포 1문, 9인치 활강포 10문, 60파운드 강선포 1문, 20파운드 후장식 강선포 1문) 병력 - 해군 및 해병대 1,230명(레밍턴 롤링블럭 M1867 후미장전식 라이플(카빈)/ 스프링필드 M1861 전장식 라이플로 무장, 12파운드 곡사포 85문.)[* 이 시기의 미군은 잡다하게 총기들을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흔히 미군이 이 전투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레밍턴 롤링블럭]]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레밍턴 롤링블럭 M1870 모델의 경우 후방 가늠자에 결함이 있어서 미 해군에서 기각하여 다른 나라들에 팔렸고, M1871의 경우는 신미양요가 벌어진 당해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무기라 당시 전투당시의 미군이 사용했을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https://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70715001067977|(다만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레밍턴 롤링블럭 M1870을 신미양요 당시 미군 측 총기들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 신미양요 당시 촬영된 미군 사진에서 발견되는 총기는 카빈형의 롤링블록 소총인데, 이는 신미양요 이전부터 미 해군이 채택하고 있었던 레밍턴 롤링블럭 M1867 카빈 .50-45 모델일 가능성이 높다. [[https://m.dcinside.com/board/gun/22098|참고1]] [[https://www.rifleshootermag.com/editorial/remington-50-70-rolling-block-hisotry/454238|참고2]] [[https://m.blog.naver.com/selfishjeon/221198344480|참고3]] [[https://en.wikipedia.org/wiki/Remington_M1867?wprov=sfla1|참고4]] [[https://en.wikipedia.org/wiki/Springfield_Model_1861?wprov=sfla1|참고5]] [[https://en.wikipedia.org/wiki/Dahlgren_gun?wprov=sfla1|참고6]]] ---- '''조선군''' 지상 병력 - 500여 명.[* 전투 개시 며칠 전에 급파되어 지휘 체계 엉망에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함.] 주 무장은 화승총[* 분당 10발 사정거리 400m vs 1~2발 사정거리 100m으로 양군의 화력 차이는 1:50] ---- '''양측 피해''' '''미군''' = 전사 3명[* 기록에 따르면 전사한 사람은 위에서 언급된 휴 맥키 [[중위]]와 해병대 [[일병]] 데니스 헨러한(Denis Hanrahan), 그리고 해군 [[수병]][* Seamen이라고 나와있는데, 대략 해군 [[일병]] 정도의 계급이다.] 세스 엘렌(Seth Allen)이라고 한다.], 부상 12명 '''조선군''' (조선측 집계)[* [[고종실록]]에서는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미군측 집계와는 달리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804028_002|출처]]] = 전사 53명, 부상 24명, 기타: 초지진, 덕진진 및 광성보 시설 함락 및 조직적인 파괴와 요새 중장비 전량 노획 및 파괴, 수자기 약탈 등 (미군측 집계)[* 미군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가 끝났을 때 광성보 일대에 널려있는 시체수는 243구, 해협에 뛰어내려 익사한 장병이 100여 명, 총 350명이 죽었다고 집계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37_0040_0030_0040|출처]]] = 전사 243명, 익사 100여 명[* 역시나 미군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내용으로 조선군 100여 명이 해협으로 집단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참전 미군인 앨버트 가스텔의 기록)], 포로 20명|| 강력한 근대식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인디언 전쟁]]과 [[남북전쟁]] 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초지진 점령.jpg|width=100%]]}}}|| ||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들 || 조선군의 경우 미 해군의 [[상륙작전]] 3일 전에야 가까스로 파견된 중앙군 3개 초(오늘날의 중대급)를 광성보에 집중 배치, 미군의 공격을 강화부에서 광성보로 유도하려 했다. 이를 위해 조선군은 미군 상륙 당일 지방군 소병력을 초지진 야습에 투입해서 미군의 반격을 유도했고, 이후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미군 앞에서 소규모 척후 병력을 수시로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광성보 쪽으로 돌리려는 두드러진 시도를 반복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예하 3개 초가 모두 타 군영 소속[* 조선군은 지방에 중앙군을 파견할 때 다른 군영 부대를 뒤섞어 보내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아마 같은 군영 부대만을 보내면 반란을 일으킬 우려를 해서 그런 듯.) 그런데 하필 조선군은 각 군영마다 군령이 다르고 훈련 방식도 달랐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조선만의 특이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국군]]도 현재까지 원정군을 파병하는 경우 각 지역에 위치한 [[육군]] [[연대(군대)|연대]]에서 [[대대]]를 하나씩 뽑아 [[여단]]을 구성해서 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비효율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게, 당시 중앙 군영은 그냥 이름 다른 부대인 게 아니라 국가 체제(세금 징수나 부역 등)과 긴밀히 연결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부대를 전체 보냈다가 전멸해 버리거나 대다수가 사망하거나 하면 국가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조선군의 중앙군 군영들은 각 지방에서 올려보낸 번상병들을 특정 군영에서 담당해서 수용, 운용했기 때문에 군영 하나를 통째로 보냈다가 전멸하거나 하면 해당 지방은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영국도 1차대전 초기에는 각 지방 출신들끼리 묶어서 Pal이라는 지역연대를 편성에 전장에 투입했더니 회전 한번에 한 지역이 통째로 줄초상나는 일이 벌어져 결국 Pal 제도를 폐지하고 각 지역 출신들을 뒤섞어 편성하는 것으로 바꿨다.]이어서 제대로 된 전투 조직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이들은 지휘관 어재연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 와 본 적이 아예 없어[* 어재연은 [[병인양요]] 당시 초지진에서 근무했었다.] 유리한 방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눈뜬 장님 상태였다. 여기에 화력조차 열세인데다 화력 집중을 위한 훈련도감 기반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 19세기 후반 조선군의 현실이었던 탓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광성보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선군은 조직적인 화망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그저 개별적으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무려 200m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조선군 200여 명에게 집중 사격을 당했음에도, 총에 맞은 미군은 단 2명(해군 견습수병(Landsman)과 해병상병(Corporal) 제임스 도허티 포함 각 1명)[* 상륙군은 해병대 [[소령]]이 지휘했으며, 해군 병력을 선두로 하여 해병대가 뒤따라 진격했다.]뿐이었다.결과적으로 3명의 전사자가 있으나 1명은 아군오사 1명은 실족사하였고 조선군이 유일하게 사살한 휴 맥키 해군 [[대위]](추서 계급, 전사 당시 [[중위]])는 성채 안에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내가 고자라니|조선군이 쏜 총에 가랑이 부위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긴급히 후송되었지만 다음 날 오후 5시 45분에 USS Monocacy 함에서 사망했다.[* [[http://www.shinmiyangyo.org/|The 1871 U.S.-Korea Conflict: Cause and Effects]] 여기에 따르면 상륙 전날 맥키는 자신의 약혼자가 어느 외교관과 바람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맥키를 쏜 조선군은 곧 도착한 윈필드 쉴리 중령에 의해 사살됐다. 이렇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전투는 미군이 돌격을 개시한지 15여분만에 조선군의 궤멸로 종료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inews365.com/pp_351223_1_1405318615.jpg|width=100%]]}}}|| ||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 >'''“조선군은 전근대적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미군의 현대적 총포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 >- W. S. Schley, Forty-Five Years Under The Flag(N. Y., 1904), p.95. >'''“전세가 위급해지자 [[어재연|어공]]은 말하기를 ‘내가 나라의 후은을 입었으니 죽음으로써 내 직책을 지킬뿐이다.’ 이에 몸을 일으켜 앞장서서 화포를 이끌고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다가 탄환이 다 떨어지자, 계속 군도를 휘둘러 적군을 格殺하였다. 시살한 지 한 시각이 지나서 세궁역진 난군중에 순사하니 이때가 4월 24일(양 6. 11)이었다.”''' >----- >- 魚在淵文書:≪雙忠集:江都實記≫·≪忠莊公遺事(乾·坤)≫. 하지만 이런 참패의 와중에서도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결사항전 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고,[* 미군의 작전 보고서란 것을 언급하며 성벽이 함락된 후 조선군 100명가량이 도망치다가 하필 그 방향에 막 전개를 마친 더글러스 카셀(Douglass Cassel) 해병 소령의 암스트롱 야포 포대가 있어, 이들의 산탄 사격에 순식간에 전멸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1차 보고자인 로저스 제독의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으며 참전 미군인 앨버트 가스텔의 기록 또한 이들이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고 적고 있으며 국내에선 이쪽이 정설이다.] 거의 학살 수준에 달한 광성보 전투에서도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여도 끝까지 싸웠고 총알이 떨어지면 칼을 휘두르며 저항했고 칼날이 부러지면 창으로 저항했으며 이마저도 없으면 돌을 던지거나 적의 눈에 흙을 뿌려서 저항했다. 함락 직후 생포한 패잔병들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으나, 대화를 거부하고 바로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미군들을 노려보며 저주의 말을 남긴 채 투신 자살하거나 아니면 미군의 총검을 붙잡고 자기 목을 찌르라는 투로 들이대던 조선군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투성이 조선군을 고통없이 죽여주자던 자비를 내보였던 미군도 있었을 지경.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미양요 돈대 1.jpg|width=100%]]}}}||<-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미양요 돈대 2.jpg|width=100%]]}}}||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미양요 돈대 3.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미양요 돈대 4.jpg|width=100%]]}}}|| 일단 위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 비교를 보면 저게 정상적인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비율이 아니다. 공격 측에서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일 각오로 하거나 방어 측에서 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인데 그전에 저 정도 전사비 자체가 웬만한 전력 차이로는 불가능한 비율이다. 지옥같은 남북 전쟁을 헤쳐나온 미군의 베테랑들도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워낙 독종같이 달라붙으니 [[모랄빵|질릴 대로 질린 모양]]. 구식이고 낙후되었긴 해도 400여 년간 임진왜란, 병자호란, 홍경래의 난 등의 굵직굵직한 거대한 전쟁 등을 벌이며 쌓아온 경험과 대원군 하에서 그럭저럭이나마 군사 기반을 갖추었던 중앙집권 국가인 조선이기에, 동양의 국가들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없고 그저 막연히 신비주의로만 생각했던 서양 열강 미국의 입장에서, 처절했던 조선군의 항쟁은 꽤 부담스러웠던 듯 하다.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들은 한 미군 [[수병]]은 "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미국에겐 이로부터 20년 후 서미 전쟁의 필리핀 전역에서 마약 빤 민다나오 모로 게릴라 군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치른 전쟁 중 가장 처절했다고 기록되었다. 물론 인디언 전쟁이나 남북 전쟁 중에서도 이런 전쟁이 없었던 건 아니고 [[의화단의 난]] 같은 경우도 존재했지만 이렇게 한쪽의 전세가 압도적으로 강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한 경우는 드물었다. 수십 년 뒤 [[이오지마 전투|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오키나와]]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건 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인 일본이 미국을 일방적으로 선공해서 일어난 전쟁이라 상황이 다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3s-gfJwro_w)]}}}||{{{#!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sniI2KSLBI)]}}}|| >[[https://youtu.be/sb9ZGrfX02E|적군은 참패의 와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 중이다. 패배가 당연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다. 아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임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아래,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칼과 창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그러나 군인들의 기강 문제와는 별개로 전략적인 측면에선 시작부터 실패한 일이기도 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수습해서 후를 도모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당시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타락하고 해이해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투 중간에 지휘관 자리에 있는 어재연이 전사[* 당시 지휘관 어재연을 전사시킨 것으로 알려진 미 해병 제임스 도허티(James Dougherty, 훗날 [[명예훈장]] 수여)의 계급은 [[이병]]이었다.]해 지도력의 부재가 있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의 상륙을 허용해 왕실과 직접 연결된 기관인 외규장각이 탈탈 털린 경험이 있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유연한 대처를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 애시당초 상술했듯, 조선군은 미군의 공격을 그나마 방어력이 강하고 방어가 용이한 광성보로 유도를 했으며 이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조선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진 않았다. 문제는 결전장으로 선택한 광성보였다. 광성보 일대는 강화도 동해안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유독 동쪽으로 튀어나온 반도 지형이라 미군이 반도 입구를 봉쇄하면 퇴각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군도 스스로 결전장으로 선택한 만큼 이 문제는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초지진과 덕진진에서 철수한 병력이 광성보를 포위한 미군의 뒤를 치는 것으로 만회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 역시 후방습격 가능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광성보로 향하는 길목의 대모산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후방 공격을 사전 차단했다. 장비의 질적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조선군에게 불운했던 점은, 미군이 남북전쟁 4년여를 겪은 사람들이어서 실전 경험이 좋았고 훈련도 또한 좋았다는 점이고, 조선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군은 광성보가 함락된 후에도 초지진 등지에서 첨사 이렴의 지휘 아래 야간 기습을 가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 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해버렸다. 조선 조정은 3일 후인 6월 14일에 그것을 확인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미양요포로.jpg|width=100%]]}}}|| || 포로로 잡힌 조선군 사진. 오른편의 조선군이 입은 옷은 미 해병대의 전투복 상의이다. 미군이 지급해 준 듯.[* [[사진]]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 사진은 조선 내에서 처음으로 찍힌 조선인의 사진이다.] || 미국은 마지막으로 사로잡은 포로들로 협상을 시도하나, 조선 조정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알 바 아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고 미국은 별 수 없이 이들을 그냥 석방해 버렸다. 이들을 찍은 사진이 미국에 남아 있다. 포로로 잡혔던 조선군 장병들은 미군이 주는 밥을 내던지며 일절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런 냉담한 말과는 달리 조선 조정은 정작 포로들이 귀환하자 치료와 구휼을 베풀고 군공을 인정해서 상까지 주며 잘 대해주었다. 이를 보면 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운운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미군 수뇌부의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와 비슷한 뻗대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포로 중 한 명은 팔에 총알을 맞았는데, 미군 측에서 전신 마취한 뒤 절단 수술을 진행했다고. 미 해군이 철수한 이유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광성보를 치느라 탄약의 반 정도를 소모했고, 식수도 부족했으며, 풍토병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온다습했던 조선의 여름은 처음이었으며 앞서 전진을 하는 동안 갯벌등을 통과하며 개인 화기의 상태도 나빠지고 있었다. 이후 로저스 제독은 미국으로 귀환 후에 대체 그 비싼 비용 쓰고 얻은 게 뭐냐고 크게 질책당했다. 불안정한 일본은 신미양요와 비슷한 사건으로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을[* 에도가 굶어서 죽든 포격전으로 쑥대밭이 되든 도쿠가와 막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 때문에 번국들과 파워 밸런스가 확 무너졌을 것이다.] 고려해 개항을 진행하였지만, 조선은 통치권이 아직 견고한 중앙집권 상태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조선군 시신을 일부 수습해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장교진은 그대로 [[매장]], 일부 조선 병사들은 [[화장(장례)|화장]]했다. 이후 시신 수습을 위해 도착한 강화도 진무사 정기원은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병사들을 불로 태워 화형시켰다며 분노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에도 시신을 화장하는 문화는 [[불교]]의 영향으로 있긴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과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매장이 기본이었으고, 아무리 큰 전투라도 가능한한 시신은 수습, 집단 무덤을 만들어 매장했을지언정, 화장은 하지 않았다. 다만 [[임진왜란]]급 대규모 총력전이나, [[병자호란]]처럼 겨울에 얼어붙은 시체가 봄이 되어 썩어 문드러져 전염병의 위험이 돌 정도였을 때나 예외적으로 화장했다. 이전 전쟁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적은 시신 250여 구를 바로 화장해버린 미 해군의 조치는 유교 교리를 한평생 받들어온 관리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광성보 전투의 패전은 조선군의 전략전술이 실패한것을 방증하고 있는데 병인양요에서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강화도 내륙으로 끌어들여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전해 프랑스군을 몰아냈지만 신미양요와 다른데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강화도 내륙으로 끌어들이기전 문수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1차적으로 27명의 사상자를 내주록 유도해 강화도에 끌어들이기전 1차로 타격을 주었고 애초에 해안가와 평지에 위치해있어 방어력이 그닥인 광성보와 달리 산맥능선에 위치해있어 방어력이 광성보와 수준이 자른 정족산성으로 프랑스군을 유인해 프랑스군 수병 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게다가 조선군은 이당시 화승총의 단점을 알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근접사격을 가했는데 방어력이 좋은 산성안에 매복해있다가 프랑스군이 화승총 사격범위안에 들어서면 일제사격을 가하는 전술을 시행해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에게 27명의 사상자 출혈을 내게했으며 정족산성에서는 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혀 프랑스군을 몰아내었는데 그에 반해 신미양요에서는 조선군의 전략전술이 상당히 후퇴한모습을 보였는데 당장 대모산에서 광성보로 향하는 미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정작 대모산에서 200명의 조선군 사수들이 미군에게 사격을 가했지만 화승총 사격범위안에 있었기에 미군이 그냥 무시하고 광성보로 향했고 광성보 전투전 초지진,덕진진에서 미군에게 1차타격을 주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후퇴하는 바람에 미군은 광성보 전투전 아무런 사상자 없이 광성보와 손돌목 돈대에 진입해 조선군을 15분만에 섬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