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성모 (문단 편집) === 해방 전 === 신성모는 [[1891년]] [[5월 26일]] 경상도 의령현(현 [[경상남도]] [[의령군]] 가례면)에서 [[아버지]] 신재록(申載祿, ? ~ ?)과 [[어머니]] [[김해 김씨]](? ~ ?[*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김해 김씨]]가 보이지 않고 다만 신재록의 [[부인]]으로 [[인천 이씨]](? ~ ?)만이 등재되어 있다.]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4327|태어났다]]. 5대조 신성제(申聖濟)가 6대조 신급(申汲)에 입양된 이후 아버지를 포함한 직계 선조가 모두 [[무녀독남]]으로, 신성모 또한 6대 독자로 태어났다.[* 참고로 아들 신명구(申明求)까지도 7대독자였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곧 [[경술국치]]를 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신채호]]와 [[안희제]]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http://kor.theasian.asia/archives/188868|#]], 이후 [[상하이]]에서 중화민국 해군총장 겸 오송(吳淞)상선학교 교장 [[싸전빙]] 제독의 허가로 오송상선학교 항해과에 특별입학하였다. 이후 난징해군군관학교로 전학하여 졸업 후 [[대만 해군|중화민국 해군]] 원수부에서 [[소위]]로 복무하였다. 이후 해사 쪽에서 일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를 맡았다. 이때 그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에 대해서 이승만을 탄핵하는 입장에 섰다. [[1921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식 이름인 신철을 받았으나 이중신앙을 허용하는 대종교 특성상 [[천도교]]도 믿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천도교 활동도 꽤 했지만 나중에 천도교였다는 사실이 싹 묻혔다. 천도교 교단에서는 정말 다행이다 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이다.] 후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다 [[일본제국 경찰|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선에 압송되어 옥살이를 했다. 출소 후에는 [[런던]]으로 [[유학]], [[1923년]] [[에드워드 7세]] 항해대학에 입학하여 1등 [[항해사]] 자격을 얻고 선박 분야에서 일했다. [[1939년]] 선장 면허를 취득하고 [[인도 제국]]으로 이동하여 [[봄베이]]의 상선회사 고문으로 일했다. 신성모의 인도 시절은 [[정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유족들마저 신성모가 봄베이랑 반대 방향인 [[캘커타]]에서 살았다고 잘못 기억할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신성모가 무슨 [[회사]]에서 일했는지 역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해방]] 후 [[허정]]의 추천으로 [[1948년]]이 되어서야 환국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3px-Shin_sung.jpg]] [[상선사관]] 시절로, [[견장]]으로 보아 [[선장]] 진급 이후로 보인다. 일부 사람들이 이 [[사진]] 띄워놓고 "[[군대]]의 군자도 모르게 생긴 뱃놈을 [[국방장관]]에 올리다니"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상선사관의 경험이 군대와 맞지 않는 것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 상선사관을 양성하는 [[해양대학교]]가 거의 [[해군사관학교]]와 구분이 안갈 만큼 [[생도]] 생활을 한다. 또한 상선의 승무원들 역시 일단 배에 탑승한 이상 말단 선원들부터 선장, [[기관장]]까지 [[해군]]에 준하는 위계질서와 통솔, 근무 [[환경]] 등에서 사는 점도 고려해 봐야 한다.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은 아예 [[미국상선단사관학교]] 출신 상선사관들에게 해군, [[해안 경비대]], [[해병대]] 등의 예비대 [[소위]] 자격을 주며, 일부는 [[예비역]]이 아닌 [[현역]] 임관도 가능하다.[* [[한국해양대학교]]도 원래 총원 해군 ROTC 제도를 운영했으나, [[80년대]]에 거의 폭동에 가까운 폭력투쟁으로 이를 철폐해 현재는 희망자만 입단한다. 군사문화 타파라는 핑계를 댔으나, 사실 같은 기간 군함보다 돈 '''훨씬''' 많이 받는 상선에서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대체복무]]를 하는 게 박봉에 근무 여건도 안 좋은 해군 장교 생활보다 나았기 때문에 저지른 짓이다. 이래놓고 후배들에겐 이런 흑역사 안 가르쳐서, 지금 후배란 것들은 왜 미국 해대는 예비역 해군 장교 다 시켜주는데 자기들은 안 주냐는 개소리를 수시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인이 해군 경험을 쌓을 경로 자체가 마땅치 않았다. [[일본해군병학교]]는 폐교시까지도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입학]]을 [[일본해군병학교]]에서 거부했고, [[수병]]도 [[1943년]]에서야 조선인 지원자를 받았다. 전쟁 말기에 그나마 2선급 [[장교]]로 취급된 비행연습생 정도가 개방되었으나, 대부분 [[임관]]되기 전에 종전을 맞이했다. 이 때문에 비단 신성모만이 아니라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한국 해군]]의 창설멤버 역시 거의 대부분 상선사관 출신이었다.[* 손원일 제독의 회고에 따르면 해군 창군멤버 중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 '서류상' 일본인이 됨으로써 일본 해군병학교에 입학, 이후 [[소좌]]까지 진급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예외 중의 예외적 케이스다. 일본해군병학교 외에 [[일본 해군]]이 운용했던 사관양성기관으로는 해군기관학교와 해군주계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 출신 조선인이 있었는지는 차후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다. 수병과 [[하사관]]도 전부 [[육전대]]나 지원부대, [[항공대]]에만 배치해서 일본 해군 출신들 대다수가 배에 대해 무지했기에, 자연히 상선사관 출신들에 밀려 대다수가 [[해병대]] 창설시 그쪽으로 빠졌다.] 게다가, 신성모는 [[인도]] 상선회사 고문을 역임했다. 당시 상선들이 해치고 다녀야 했던 해역이 '''[[태평양 전쟁]]''' 한가운데의 피튀기는 전장이었음을 생각하면, 신성모는 사실상 전시 업무를 일부 수행한 것이다. 더군다나 위에서 언급했듯 신성모가 짧게나마 해군 장교(소위)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래저래 '뱃놈'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인재였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