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축민란 (문단 편집) ===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하라! === 결국 1901년 2월, 훈장이었던 현유순(玄裕順), 그의 아버지 현규석(玄圭石), 장의(掌議) 오신락(吳信洛)이 천주교 정의성당으로 끌려간 이후 귀가해 자살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참다 못한 제주도 내 유지들이 4월에 교폐와 세폐를 막기 위해서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제주도민들이 이곳에 모여서 가톨릭과 교회의 폐해, 지나친 세금 등을 토로했고 이를 제주[[목사(관직)|목사]]에게 시정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5월 14일]], 이들은 지역의 향장(鄕長)인 오대현을 장두로 내세우고, 세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제주목사에게 제출하기 위해 동진과 서진으로 나누어 제주읍성을 향해 출발했다. 천주교 측은 해산시키기 위해 민회를 습격해 장두인 오대현을 비롯한 6명을 체포해갔다. '''그러자 상무사 내부에서는 [[이재수]]를 새로운 지휘자로 추대하고 [[일본인]]들에게서 무기를 구입해 제주도 내의 여러 가톨릭 성당들을 불태웠다.'''[* [[일본]]이 가난한 섬 사람들에게 꽤 싼 값에 무기를 제공한 점을 통해 [[동학농민운동]] 이후 [[대한제국]]에서 전쟁을 구실 삼아 간섭하려고 했지만 [[프랑스]]가 끼어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이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프랑스가 일본에게 제주도민들의 일제 무기 구입에 대하여 일본을 탓하자, 일본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한 게 아니라 몇몇 무기 업체들의 짓"이라고 변명했다.] '''당황한 프랑스인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은 제주성으로 피난 갔지만, 제주성을 지키던 대한제국 주둔군조차 그다지 이들을 지켜줄 마음이 없었고''' 결국 [[5월 28일]], 몰려오는 민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일단 명색이 주둔군이다 보니 공격을 하긴 했다. 제주목사 김응석은 일단 공격 명령을 내려 몇 차례 사격을 가하여 몇몇 민군을 사살했으나, 그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주둔군에게 사실상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민군 측 사망자는 8명으로 그쳤다. 그렇게 성으로 들어온 민군들은 닥치는대로 참수했는데 그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 당시 제주도의 고위 관리들도 천주교인들이 관리들도 무시하며 저지른 짓에 이를 갈아왔기에 나몰라라 하였고, '''제주도 군졸들은 되레 이들에게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으며, [[대정군|대정군수]] 채구석[* [[애경그룹]] 창업주 [[채몽인]]의 아버지. 파직 후 서귀포 천제연 폭포 근처에 논 5만 평을 개간하기도 했다.]은 아예 반가톨릭 단체를 만들어 이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며 뒤로 돕기까지 했다.'''[* 다만 채구석은 신부들 중 일부를 보호해주거나 이후 프랑스 측이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해도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인들을 살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파직]]당할 때 프랑스 측이 오히려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파일:attachment/이재수의 난/3d.jpg]] [[프랑스 해군]]이 촬영한 당시 제주성 부근의 천주교인들의 시체 이들 대다수가 학살당하고도 묻히지 않고 그대로 바깥에서 썩어나갔다. 나중에 대충 집단 무덤을 만들어 파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참수된 신부들이 모두 [[프랑스인]]이었기에 프랑스 측이 이를 빌미삼아 제주도에 [[프랑스군]]의 [[군함]] 2척을 파병하면서 일이 커져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