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축민란 (문단 편집) == 평가 == 외세 종교로 인한 충돌과 서양 군대의 침입, 3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던 여러가지로 큰 역사적인 사건이건만 이상하게도 이 사건은 그동안 한국 근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한국사 교과서에서조차 언급이 없다.] 한반도 본토에 비해 제주도 향토사에 대한 관심 자체가 미비하고, 다른 항쟁에 비해 파급 효과가 적은 것이 그 이유로 볼 수 있다.[* 또한 1885년 러시아 함대가 일으킨 [[제주성 위협사건]]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나마 1961년 이재수의 혈육 이순옥 씨의 주도로 제주도민들은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사람을 기려 삼의사비라는 비석까지 세웠다. 비석의 위치는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계의 반발로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진 이 비석은 1997년 새로운 3의사비가 세워지면서 그 비석 밑에 묻혀 버린다. [[파일:external/pds18.egloos.com/e0006522_4dc5f2b7b750d.jpg]] 새롭게 만든 3의사비. 새로 만든 비 아래에 이순옥 씨가 1961년에 주도하여 만든 3의사 비가 묻혀 있기에 제주도에서도 이걸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3의사비의 비문에 대해서 논란이 조금 있었다. 비문의 내용 중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 '정명련'이라고도 한다.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이다. 정 마리아가 유배 갈 당시 아들 황경한은 2살이었고, 어머니와 헤어져 [[추자도]]에서 자랐다.] 마리아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란 부분에서 가톨릭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에서 이에 대해 지나친 내용이라고 반발하였으나 비석의 건립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http://seogwipo.grandculture.net/seogwipo/toc/GC04600609|#]] [[일본]]의 영향 등이 잘 나타나 있지 않은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8184&cid=46646&categoryId=46646|이 문서]] 등을 참고. 다만 링크에 나온 내용은 민란을 일으킨 세력들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에 비해 당시 천주교도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으므로 걸러봐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