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축민란 (문단 편집) == 가톨릭 측 반응 == [[https://youtu.be/JlBiB6qmelE]] 1999년 천주교 제주교구는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과거 교회사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도를 벌였다. 2003년 11월 천주교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신축년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채택했다. 선언문을 통해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고 다짐했다. 2011년에 가톨릭에서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1/01/2011110100082.html|당시 가톨릭 신자 사망자들을 복자로 시복 추진하겠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복자|시복]][[시성]]을 준비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124위]]에는 이재수의 난 관련자가 단 1명도 없다. 상술된 것처럼 가톨릭 측 피살자의 상당수가 가톨릭의 이름을 내세워 강간, 고문 등을 저지른 [[파문]]당해 마땅한 중범죄자들이라, 이들이 시복된다면 다른 제대로 된 [[순교자]]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정상적으로 심사한다면 탈락하는 게 당연.[* 저 강간, 약탈, 살인 등의 죄명들은 '''[[십계명]]에서 금지한다!''' 십계명이 기록된 출애굽기는 그리스도교에서도 경전으로 인정하는 만큼 당연히 이들은 가톨릭 관점에서도 죄인으로 시복은커녕 파문시킨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다.]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낸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2111629|순교의 맥을 찾아서]](2009)를 보면 646쪽에 나온 부분이 비가톨릭 쪽으로 보면 굉장히 거슬릴 수도 있다. "지방관리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비리를 [[가톨릭]] 쪽으로 넘겼으며 무당 및 토착 세력이 도왔다"라고 하면서, 오대현과 이재수에 대하여 그저 반란자, 폭도로 묘사하고 있으며 가톨릭 신자 학살이라고 쓰고 있다. 다만 이 책은 "가톨릭이 피해자다"이라며 변명하는 [[불쏘시개]]는 아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인 648쪽에서는 이 난에 대하여 4가지로 압축하여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단, 그러는 와중에도 결정타가 된 온건파 지도자 납치는 없다고 침묵한다. >1. 일부 가톨릭인들의 비리 및 행패를 저질렀으며, 비리를 저지른 관리들이 가톨릭인을 고용하여 더 행패를 조장했다. >2. 이에 대하여 [[프랑스인]] [[신부(성직자)|신부]]들은 그저 무조건 옹호하면서 외세와 종교에 대하여 제주도민들에게 증오를 받았다. >3. 한국 침탈을 노리던 [[일본]]이 무기를 제공하고 분열을 조장했다. >4. 거기에 무조건적인 가톨릭 믿음을 강요하며 무속 및 토속 신앙 및 [[불교]]같이 오랫동안 자리를 한 이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이 일이 있었다고 제주도에서 가톨릭의 교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선교사들이 와서 다시 선교를 해서 어느 정도 다시 교세를 일으키고 학교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선교사들이 자국으로 징병당해서 다시 쇠퇴했다. 당시(1902년) [[선교사]]가 상부에 보낸 기록에 의하면, 신입 신자들은 그렇게 많은 살인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대정(大靜) 지역은 여전히 적의에 차서 도망가는 몇몇 신자들을 놓친 것을 한스러워하고, 정의(旌義) 지역은 좀 온건하나 가톨릭인을 자처하는 불량배들이 외교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데,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에게서 쫒겨난 이들로서 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가족이 학살당했다는 구실하에 돈을 갈취하고, 이에 선교사는 이들 여러 명을 관아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교구연보;1878~1940. 362페이지] 이 사건의 발단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이 상당했는데, 이런 제주 가톨릭 교회와 [[일본인]]의 갈등은 이어져서 1902년 6월 양시중(梁始中)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교회와 제주 향촌 사회와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아. 1903년 초에는 [[정의군]]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의 타파를 요구하는 문서가 나돌았으며, 호근리에서는 허 좌수(許座首)라는 자가 가톨릭 결사를 조직한 적도 있었다. 결국 1902년 김명필 사건이 터져 갈등이 드러났다. 2016년 '신축화해의 길'을 만들어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한 다음 화해했다. 천주교 제주교구 제5대 교구장 문창우 비오 주교가 신축년 제주항쟁 사건과 관련해 [[https://www.yna.co.kr/view/AKR20201221051400056|인터뷰를 나누었다.]] 2021년 천주교 제주교구는 황사평과 하논본당 등에 '화해의 탑'을 제막하고 위령미사를 거행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