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한국당 (문단 편집) == 상세 == 가장 짧게 존속했던 여당의 당명 가운데 하나로, 비슷한 예로는 [[열린우리당]](3년 9개월), [[대통합민주신당]](6개월)이 있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사실 [[노무현|대통령]]이 입당한 적은 없어서 엄밀한 의미의 여당이라고 하긴 어려우므로, 신한국당이 '가장 단명한 대통령 소속당명'이라 볼 수 있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다수파는 여전히 [[민주정의당]] 출신의 [[민정계]]였는데[* 다만 [[제14대 대통령 선거|14대 대선]]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한 이른바 '''신'''민주계로 분류되는 민정계 인사들도 있었다.], 김영삼은 [[김문수]], [[이재오]] 등 [[민중당(1990년)|민중당]] 출신들을 영입하며 민주계의 세를 강화하는 한편,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은 민자당 내에서 서서히 외곽으로 밀려나다가 1995년 초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며 공화계 의원들과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탈당했다. 1995년 12월 김영삼은 '''[[5.18 민주화운동#s-4.4|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노태우와 함께 만들었던 민주자유당의 간판을 내려버리고, 김영삼의 대선 슬로건이었던 '''신한국 창조'''에서 따온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로고 역시 교체했다. 또한 중도 노선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이는 당시 진보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도 취한 태도였다.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정치)|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다.[* 양당이 서로 중도화하면서 성향 차이가 거의 없어지다보니 소속 정치인들 또한 당적 변경에 거리낌없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96년]]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도권에서 선전했음에도[*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 검사로 떴던 [[홍준표]], [[민중당(1990년)|민중당]] 출신의 [[이재오]], [[김문수]] 등 정치 신인들을 대거 공천하고 야권이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으로 분열한 영향이 컸다. 대략 수도권에서 30여개의 선거구가 야권 분열로 승패가 뒤집혔으며, 심지어 야권 단일화를 가정한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는 야당에게 1당을 내줄 수도 있었다.][* 이렇게 개혁 공천으로 영입되어 당선된 인사들을 YS키즈라고도 칭한다. 이때 당선된 초선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며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은 야당 시절에도 정국을 주도했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탈환한다.] 전두환, 노태우 구속의 역풍을 맞고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에서 [[자유민주연합]]과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주는 바람에 과반수 확보에 일단 실패했으나, 선거 후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와 과반수를 확보하였다.[* 이 때문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훗날 김대중과의 관계가 틀어졌음에도 이회창에 대한 적개심을 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불과 2년 만에 김대중 정권이 거꾸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 의원 영입을 통해 정계개편을 인위적으로 감행할 때는 이에 반발하던 [[하순봉]]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향해 [[구천서(정치인)|구천서]] 자민련 원내총무가 '''"우리는 원금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일갈하는 굴욕적인 상황도 있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8/nwdesk/article/1976068_30723.html|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 1996년 12월 [[크리스마스]]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직권상정]]) 파동[* 그냥 "날치기"라고 하면 와닿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비정규직(변형근로제) 및 파견근로제를 골자로 한 새 노동관계법, 그리고 불고지죄 및 찬양고무죄 수사 부활을 골자로 한 새 안기부법'''이 이 때 통과되었다. 당시 안기부장은 [[하나회]]를 분쇄해버린 [[권영해]]. 대신 복수노조 허용이란 순기능이 있었다.]과 [[1997년 외환 위기]]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97년 11월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된다. 15대 대선에서는 [[제15대 대통령 선거#s-3.1|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었다. 이 때 선출된 후보가 [[이회창]]. 당시 9명의 후보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하여 '''9룡'''으로 불렸다. 마침 명사극 [[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될 때라서, 이들을 다룬 만평 중 용의 눈물 버전으로 된 9룡 풍자도 꽤나 등장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