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한민주당 (문단 편집) === 야당 돌풍 === 사실 당시에는 선거구당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 중선거구제는 1개 선거구당 2~4명을 뽑는 방식이다. 즉 1위를 하지 않아도 당선될 수 있다. 참고로 [[소선거구제]]는 1선거구당 1인을 [[대선거구제]]는 1선거구당 5인 이상을 선출하는 방식을 뜻하며 보통 중선거구와 대선거구를 묶어 중대선거구제로 칭한다.] 방식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민정당은 가장 취약하다는 호남 지역에서도 '''2위 당선'''을 통해 의석을 상당수 확보할 수 있었으며[* 사실 이때는 아직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광주를 제외하면 사실상 호남 지역 전체가 여당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12대 총선 당시 호남 지역 개표 결과를 보면 '''대도시인 전남 광주와 전북 전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민주정의당이 1위를 차지했다.''' 전북 지역이야 묘하게 전남 지역과 정서 차이가 예나 지금이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전남 지역에서는 광주에서도 그나마 27~28%로 저조했을 뿐이지, 그 외 지역에서는 30~40%대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의 고향인 [[신안군]]이 속한 제3선거구(목포시·무안군·신안군)에서 민정당 [[최영철(1935)|최영철]] 후보가 전체 37.24%에 '''신안군에서 49.99%(!)를 얻었고''', 제9선거구(장흥군·강진군·영암군·완도군)에서는 민정당 [[김식(1933)|김식]] 후보가 '''전체 49.42%에 완도군에서는 __60.1%__(!)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즉, 이 때까지만 해도 호남 지역조차 [[여촌야도]]가 극심했던 것.], 여기다가 '''지역구 제1당에게 전국구 의석의 2/3를 몰아주는 선거법'''까지 있었기에 여당의 과반수는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과반수를 확보한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이 안심할 수는 없었다.''' 국회에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 정권이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야당이 허수아비마냥 가만히 있을 때나 그런 건데[* 실제로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이 있었기에 국회에서 별다른 잡음이 없었던 것.] '''선명 야당을 주창하는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에 오르게 될 경우 정부와 여당을 사사건건 걸고 넘어질 게 뻔했기 때문.''' 그렇다고 제1 야당을 섣부르게 건드렸다가는 자칫 더 큰 역풍이 불어서 정국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데다, 무엇보다도 정권 임기 7년의 정중앙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정부와 여당 입장에서는 신경을 바짝 쓸 수밖에 없었기에 무소불위의 철권 통치를 휘두르는 전두환 정권이 고작(?) 총선 시기를 바꾸는 자잘한 꼼수나 부렸던 것.[* 물론 마냥 꼼수만 부린 건 아니었고 기존의 관제 야당 쪽 인사들이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는 걸 막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 대표적으로 민주한국당의 [[신상우]] 사무총장이 있었는데, 방준필 안기부 서울분실장이 불러내서 '''"우리는 이 세상 누구든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다. 의원님의 사돈에 팔촌까지 죄는 만들면 된다."'''는 섬뜩한 말로 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 (...)] 다만 총선 직전까지도 신한민주당의 전망은 좋지 않았는데, [[노신영]]의 [[국가안전기획부]]의 판세 분석 결과 최대한 많이 얻어봐야 20~30석 정도에 그치고 특히 [[종로구·중구]] 선거구(중대선거구제였다)에 출마한 이민우 총재는 3위를 기록해 낙선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1위는 민주정의당 [[이종찬(1936)|이종찬]], 2위는 민주한국당 [[정대철]]로 예측.] 이민우 총재가 5선으로 야권의 원로 정치인이긴 했지만 1번은 전국구였고 나머지 4선 역시 충북 청주/청원에서만 지낸지라 서울에 출마할 만한 전국적 인지도도 없고 그렇다고 종로/중구에 지역적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김영삼의 출마 권유에 망설였을 정도. 더군다나 선거 기간은 한 달이 채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더 절망적이었다.[* 다른 지역은 그렇다쳐도 명색이 총재라는 이민우가 낙선한다는 것은 신한민주당 입장에서 가장 큰 타격이었다. 이 때문에 이민우가 끝까지 출마를 주저했던 것.] 그러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고 뚜껑을 열어보니 신한민주당은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지역구 50석에 전국구 17석을 확보하면서 일약 제1야당으로 급부상한 것.''' 특히 낙선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민우 총재는 2위로 당선되었으며 그 외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대구광역시|대구직할시]][* 다만 대구는 민한당이 접전 끝에 민정당을 제치고 승리한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인천광역시|인천직할시]] 등의 대도시 지역에서 민정당을 제치고 1당이 되는 압승을 거뒀다. 한 선거구당 2명을 뽑는데 야당 의석수가 많았다는 건 곧 여당이 3등 이하 득표로 떨어진 선거구가 있었다는건데, 실제로 서울 1개, 부산 3개, 대구 1개나 되었다. 전형적인 [[여촌야도]] 현상. 이는 신한민주당조차 예상을 뛰어넘는 의석수에 어리둥절할 정도로 엄청난 결과였다. 실제로 신한민주당은 '''서울(14개), 부산(6개), 인천(2개)은 모든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냈으며''', 여당의 아성인 대구에서조차 3개 선거구 중에 2석을 확보했다. 특히 부산의 경우 나머지 6석 중에 민주한국당 2석, 한국국민당 1석을 차지한 결과 민주정의당 달랑 3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는 부산 중구-동구-영도구 지역구에서 민주한국당 [[김정길(1945)|김정길]] 후보가 사용한 '''"아빠는 신한민주당, 엄마는 [[민주한국당]]"''' 같은 유세방식으로 두 야당이 은근슬쩍 공조하면서 여당에 [[빅엿]]을 선사한 결과였다. 특히 서울에서의 승리는 총선 4일 전인 2월 8일 [[김대중]]이 전격 귀국하면서 호남 출신 표가 신한민주당에 대거 몰린 것이 결정타였다. 김대중의 귀국 당일 김포공항 일대에 엄청난 환영 인파가 몰려와서 도로가 마비되었을 정도.[* 이에 경찰 병력과 안기부 요원들이 김포공항을 철저하게 봉쇄하여 시민들과 차단시키고 곧장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김대중이 혼자 온게 아니라 미국의 여러 저명 인사들이 호위하며 따라왔고 당연히 김대중을 [[납치|모셔가는 과정]]이 미국인들에게 생생히 보여졌다. 무엇보다 [[공화당(미국)|공화당]], [[민주당(미국)|민주당]] 상원의원에다가 '''전직 외교관'''까지 있었던 탓에 미국 측이 강하게 반발했고 전두환 정권을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 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메가톤급 후폭풍을 몰고 왔다. 지역구 득표율을 종합해보면 신한민주당 29.3%, 민주한국당 19.7%로 두 야당만 합쳐도 무려 '''49%'''로 민주정의당의 35.2%를 한참 앞서는 수치였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하면, 만약 이때 비례대표를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고르게 배분했을 경우 '''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 120석 VS 민주정의당 119석'''으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총선 결과를 보고받은 전두환이 아무 말없이 탁자를 탁탁치며 허탈해하다가 과반 의석은 차지했다는 [[노신영]] 안기부장의 보고에 '''"전국구가 있으니까 그 정도나마 얻은 거잖소!"'''라며 역정을 냈고(...), 예측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노신영은 그날로 경질되었다.[* 하지만 아예 짤린 게 아니라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선에서 헛다리 짚은 것만 빼면 워낙 일을 잘 해왔기에 전두환은 노신영을 경질시키고 다른 자리를 주려 했는데, 다시 외무부 장관으로 보내자니 부총리급인 안기부장을 했던 사람을 도로 장관급으로 보내는 꼴이라 고민고민하다가 국무총리로 발탁한 것.] 또한 국민들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규제 인사들을 대거 해금시키는 등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에 이른다.[* 단, 김대중의 경우 내란 음모 건에 대해 사면복권을 해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있어도 정치 활동을 여전히 제약한 것.] 게다가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공천으로 당선된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당세는 순식간에 103석으로 불어났다. 이는 당시 야당 사상 최대 의석이었다.[* 당시 전체의석은 276석으로, 민정당은 148석을 차지했는데, 이걸 오늘날의 300석으로 환산하면 161석 대 111석이었다.] (비율상으로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최대.) 다만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민주한국당의 새 총재로 내정된 [[조윤형]] 전 의원이 신한민주당과의 합당을 결의했으나 신한민주당 쪽에서 이를 거부하면서[* 그간 관제 야당으로 정권에 대한 견제 능력이 없다시피 했던 민주한국당과의 합당 자체도 모양새가 안 맞지만 무엇보다도 양대 계파인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신한민주당 위주의 야권 재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조윤형 총재를 비롯한 상당수 의원들은 자기 당을 탈당한 뒤에 개별로 신한민주당에 입당해야만 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같은 해 8월 1일,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임시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임시직으로 추대되었던 이민우 총재가 김재광 후보를 이기고 총재로 재선출되었다. 임기는 2년. [[땡전뉴스]] 일색이었던 [[대한뉴스]]도 보도해 주었다. [youtube(kt6N0JTsOvA)]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