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해혁명 (문단 편집) ===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 === 한편 청나라의 멸망은 베이징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1월 중 [[프랑스 혁명]]의 [[루이 16세]]까지 운운하며 청나라 황실을 겁박하여 공화정 수용을 요구했고 황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돤치루이]]를 필두로 공화정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벌이며 입헌파였던 군주입헌유지회의 만주족 청년 장교 양필(良弼, 량비)을 살해했다. 위안스카이를 물리치고 혁명군에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입장이었던 공친왕 푸웨이가 선통제의 숙부에게 군 병력 상황을 묻자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란 답변이나 나오던[* 재풍의 동생들인 재순과 재도는 둘 다 서구 유학을 다녀와 해군대신과 기병대의 전력인 양황기몽고도통을 해먹었지만 이런 소리나 하고 있었다. 결국 푸웨이는 복벽 의지를 관철하여 [[만주국]] 건국을 본 후 사망했지만 재순은 신해혁명 후 평생 조용히 살았고 재도는 [[정사복벽]]에 꼽사리 끼며 정계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훗날 인민해방군의 [[정치장교]](!)와 정협 위원을 역임하고 [[경극]]이나 즐기며 잘 먹고 잘 살다 갔다.] 청나라였기 때문에 결국 어전회의에서 공화정은 수용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고[* 선통제는 청나라 멸망 후에도 중화민국의 예우 덕에 [[핍궁사건]] 전까지 [[청나라 소조정]]의 황제로 삶을 이어갔다.] [[북양군벌]]이 자금성을 장악했다. 다음 날 [[쑨원]]은 총통에서 물러났으며 3월 10일에는 [[위안스카이]]가 신정부 2대 임시 대총통에 정식 취임해 청나라의 멸망을 확정지었다. [[오삼계]] 등 한족들의 투항 덕분에 중원을 점령하여 다스릴 수 있었던 청나라는 결국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위안스카이|한족]]의 투항으로 멸망한 셈이다. 쑨원 측은 위안스카이에게 신정부 수반을 위임하는 대가로 [[난징시|남경]] 천도와 민주공화정제라는 합의를 얻어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아래 내용대로 전부 폐기당했다. 즉, 이 협상은 비록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이후 반세기 가까이 중국을 격렬한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불씨로 작용했다. 여담으로 신해혁명 당시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봉기에 가담한 외국인들이 엄청 많다. 특히 가장 많은 게 일본인데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다.(ex: [[우치다 료헤이]], [[기타 잇키]]) 일본 국수주의자들은 '[[아시아주의]]'를 주창해 왔기 때문에 중국 혁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다. 한국인들 중에도 신해혁명에 가담한 인물이 있었는데 예관 [[신규식]]과 범재 [[김규흥]], [[유동열]] 등이 있다. [[http://hinews.asia/sub_read.html?uid=1206§ion=sc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