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기원 (문단 편집) === [[이괄의 난]] 시기 === 인조 2년(1624)에 정이품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그 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괄]]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흥안군|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가 [[광주시|소천(昭川)]]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현감 안사성(安士誠)에게 붙들려 압송되었다. 그런데 심기원이 신경진 등과 짜고 흥안군을 국문하지도 않은 채 [[창덕궁 돈화문]]에 목을 매달아 죽여버리는 악수를 두었다. 원래 조선은 사형도 임금에게 재가를 받아서 집행한다. 공신이라고는 하지만, 신하가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왕족을 죽임은 심각한 월권행위였기에 인조의 눈 밖에 나서 돌아오자마자 하옥되었다.[* 흥안군은 이괄의 난 직전에도 대신들이 이괄과 내통했단 의혹을 이유로 가둬둘 것을 주청했으나 인조가 그 말을 듣질 않았을 정도로 아꼈던 인물이다. 흥안군이 인조와 함께 공주로 이동했다가 달아나 이괄의 진영으로 간 이후에야 분노했을 정도.] 다만 흥안군이 반역에 동참하려 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던지라 사형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차기 국왕으로 옹립한 왕족을 임금의 허락 없이 멋대로 죽인 점은 전대 [[고려시대]]에서 [[삼별초의 난]] 당시 [[승화후]] 왕온을 죽였던 [[홍다구]]와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