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기원 (문단 편집) === [[병자호란]] 시기 === 후금의 군대는 [[홍타이지]]의 지휘 하에 [[산해관]] 이북의 명나라 영토와 몽골 고원 일대를 장악하고는 마침내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인조 14년(1636) 음력 12월에 청의 군대가 침공하자 인조는 심기원을 수도를 방어하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 한편, 도원수로서 서북쪽의 방어를 담당했던 [[김자점]]이 이끄는 군대는 정방산성(正方山城)[* 오늘날의 [[황해도]] [[사리원시]]의 정방산 부근이다.]에 주둔해 청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청군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는 달리 수도 한양을 노렸기에 김자점의 군대를 우회해 진격했다.[* 사실 '적군이 보급을 확보할 주변지역을 장악하지 않고 수도로 바로 진격하면 어찌하느냐.'는 논의는 이미 광해군 시절에도 있었지만, 섬으로 피난을 하거나 산성에 의지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광해군 시기는 명나라가 아직은 건재했고 일본에는 [[에도 막부]]가 들어섰으며 중립외교로 침공 위험도 적었기에 괜찮았다. 그러나 인조 즉위 이후로는 후금과 관계가 험악해졌기 때문에 이 문제에 반드시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반정과 이괄의 난을 수습하느라 그러질 못했다.] 인조는 본디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청군이 신속하게 한양 외곽까지 진격해오자 하릴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김자점은 부랴부랴 남한산성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도르곤]] 등이 이끄는 청군과 마주쳐서 토산에서 전투를 벌여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난전으로 타격을 심하게 받아 [[양평군|양평(楊平)]]의 미원(迷原)에 주둔한 이후 호란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질 않았다. 그 사이 한양은 8일 만에 함락되었다. 김자점이 양평에서 움직이질 않자 인조는 심기원을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로 삼고 남쪽의 근왕군을 지휘하도록 했으나, 심기원은 직위가 무색하게도 남쪽 근왕군을 만나지도 못한 채 김자점이 군대를 주둔한 미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강원도에서 패배한 근왕군이 합류했으나, 인조가 김자점을 삭탈한 뒤 심기원을 임명한 게 아니라 그냥 도원수에 임명하였기에 한 군대에 도원수가 둘인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포위를 뚫자는 김자점과 아직 그럴 상황이 아니라며 반대하는 심기원의 의견이 충돌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군대는 이도 저도 못한 채 도원수들이 방침을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남한산성은 원래 피난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임금이 조정을 이끌고 장기간 버틸 만한 식량 등이 없었고 겨울의 혹한은 매서웠다. 그런 열약한 상황에서 각 지역의 근왕군들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청군의 포위를 뚫지 못했고, 정예군은 지휘관이 2명인 채로 양평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강화도까지 손쉽게 함락되자 결국 인조와 대신들은 견디지 못하고 성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니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인조 15년(1637) 음력 1월,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고작 한 달 20여 일 만이었다. 심기원은 수도를 지키는 유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양을 지키지 못했고, 제도도원수로 임명했으나 지휘권 혼란으로 아무것도 못했기에 불신을 받았는지 한동안 중용되지 못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