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영(배우) (문단 편집) === 그 외 === 심영이 젊었을 때에 친일 연극을 많이 한 탓인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황|퇴계 이황]]과 [[이이(조선)|율곡 이이]]를 [[정인홍|매우 싫어하고 까내렸으며]], 그 사이에서도 이황이 동방의 [[주자(철학자)|주자]](朱子)로 불리며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영은 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월북]]한 이후, 그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 가운데 '[[술버릇|술만 마시면]] [[이이(조선)|이이]], [[이황]]을 욕하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1941년]], 당시에 스타였던 [[박향림]][*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가수.]과 음반을 녹음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대사 파트를 맡았다. || [youtube(6txocz6V2MQ)] || [youtube(qmHu-PxcRNA)] ||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17459905&dir_id=0&page=0&query=%EC%8B%AC%EC%98%81&ndsCategoryId=10208&library=81|'배우 심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다.]] 국회도서관에도 등록되어 있다. 워낙 고자 이미지가 강렬해서 자녀가 없었을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심영에게도 심원보라는 아들이 있었다. 재소 과학자 장학수의 자서전 "붉은별 아래 청춘을 묻고"에서 이름이 언급되는데 1947년 당시 경복중학교 5학년[* 당시에는 중학교 6년제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2학년 정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이 분리된것은 1951년의 일이다.]이었다는 서술로 보아 1930년생으로 추정된다. 좌익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심원보도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와 함께 월북한것으로 보인다. 심원보 이외의 자녀가 더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