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영(배우)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는 극단 혁명극장을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자]]'''로 활동한다. [[1946년]], 조선연극동맹[* 해방 후에 설립된 좌익계열 연극단체.]과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개최한 ‘3·1절 기념연극제’에서 박영호[* [[박영호]]는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선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해방 후에는 좌익 활동을 하였고 월북하였다.] 극작, 박춘명[* 마찬가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였고 월북하였다.] 연출, 극단 혁명극장의 《[[님(희곡)|님]]》을 국제극장(현 명동예술극장)무대에 올리고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야인시대]] 드라마에서는 이 《님》이라는 연극이 사회주의 찬양 연극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김두한이 동아방송 인터뷰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4&r_serial=02|링크]] 에서 한 발언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당시의 자료[[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3130020920202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3-13&officeId=00020&pageNo=2&printNo=6921&publishType=00020|#1]][[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694|#2]]를 보면 실제로는 3·1 운동 당시의 학생들을 소재로 한 연극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창작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1946년, 당시의 사회에서는 용인 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 물론 창작자와 연기자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사회주의자라 친일파와 비교적 척을 지고 반공주의에 우익인 김두한이 보기에는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연극 《님》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1946년]] [[3월 14일]]~~하필 화이트데이에~~ 오후 8시 30분경에 [[광통교]] 정 중앙[*B [[광통교]]가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선인데, 김두한이 이를 노린 것이다. 왜냐면 중구와 종로구가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떠넘기면서 수사가 지체될 수 있기 때문[[https://youtu.be/BMDPMS6p8Gw|#]]]에서 [[김두한|괴한]]의 권총습격을 받아 하복부에 중상을 입고, [[김성진(1905)|김성진]] 외과에 입원하였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ld=194603160020920202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3-16&officeId=00020&pageNo=2&printNo=6924&publishType=00020|기사]] 그런데 하필이면 심영이 권총습격을 당했던 그 장소가 상당히 골때리는 위치였는데 바로 [[종로구]]와 [[중구(서울)|중구]]의 정확한 경계선인지라 어느 경찰서에서 수사를 해야할지 상당히 애매한 위치였다.[*B] 이후 동아방송 인터뷰 ≪노변야화≫에서 [[김두한]]은 자신이 심영을 습격한 것이며, 죽지 않은 그를 다시 찾아가 죽이려 했지만 [[심영의 어머니|어머니]]의 애원으로 살려주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에는 김두한이 심영의 이름을 '심형일'이라고 말하고 극장과 병원 이름을 틀리게 말하는 등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 그가 회고한 동아방송 ≪노변야화≫ 라디오 인터뷰 육성 녹음본을 들어보면 '심형일이라고 말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4&r_serial=02|#]] 이는 [[구마적]]의 본명 사례처럼 김두한이 말할 때 발음이 부정확한 탓에 기록자가 '심영'을 '심형일'으로 잘못 듣고 글로 쓴 내용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병원명의 경우, 최초 신문기사에서는 대놓고 '심영이 김성진 외과에 입원했다'고 밝혔으니, 심영이 우익에 의해 2차 테러를 당할 우려가 있어서 이로 인한 신변문제로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백병원]]으로 이송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야인시대]]의 [[의사양반]]의 말처럼 [[의료전달체계|그 병원에서 안 되어서]] 백병원으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김두한 일당에게 피격된 이후 약 10개월간 치료 및 휴식으로 인한 공백기를 가졌다. 다만 10개월 동안 무대에 안 나왔을 뿐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남한에서 극단 민중극장을 창설하고 공연을 제작하는 활동을 했으나, [[1947년]]에 좌익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703270032920302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03-27&officeId=00032&pageNo=3&printNo=147&publishType=00020|기사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70813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08-13&officeId=00020&pageNo=2&printNo=7356&publishType=00020|기사2]] 동년도 7월에는 대구에서 연극 활동을 하다가 또 총탄에 피격된 일도 있었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simyoung&no=2998|#]] 탄압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1947년]] 말 혹은 [[1948년]] 초에 월북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 연기부장 심영은 [[조선인민군 육군]] [[소령|소좌]] [[계급장]]을 달고, 서울에 들어왔다. 심영과 [[황철]]은 피난하지 못한 연극, 영화인들을 끌고와서 서울예술극단을 만들어 공연을 시켰으며, 후퇴하면서는 이들을 강제로 끌고가 [[납북]]시켰다. [[최은희(배우)|최은희]]도 이때 많은 고초를 겪고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077778|기사]] 월북한 이후에는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황철]]과 함께 북한 예술사에서 이름을 날린다. 그가 출연한 작품은 '내고향'(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정찰병'(1953),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 '두만강'(1960), '다시 찾은 이름'(1963) 등이 있는데, 대부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다.[[http://naver.me/xk0AC5UA|북한 백과사전의 심영 설명]] [[1952년]]에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 및 북한의 국립 연극극장 배우가 되었다. [[1959년]]에 조선연극인동맹 부총장을 맡았다. [[1961년]]에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겸 조선문화예술인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같은 해에 북한의 영화대표단 단장의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을 역임했으며, [[1957년]]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1964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