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유경 (문단 편집) == 행적 == 심유경의 생애 전반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명사(역사책)|명사]]에는 심유경이 시중의 무뢰한이라 되어있는데, 추정컨대 아마 한미한 출신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는 가정 연간에 절직총독 호종헌의 수하에 있으면서 간첩을 사용해 왜인을 많이 독살해 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조정에 글을 올려 이로 인해 조선으로 갈 수 있었고, 왜적의 실정을 정탐하는 것을 편의대로 처리하도록 허락받았다고 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 병부상서 [[석성]]의 추천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접촉했다. 1593년에는 일본까지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도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히데요시의 현실성 없는 요구 등으로 협상이 난항을 겪자 고니시와 공모해 문서를 조작하기로 했는데, 이를 [[사이쇼 조타이]]가 무시하고 명에서 보낸 문서 그대로 읽어버려 거짓이 들통났다는 식의 이야기가 꽤 유명하다. 하지만 알고보면 이 스토리는 허구라고 한다. 실제로 협상한 건 맞지만 사이쇼 조타이 내용 등은 이후 일본에서 창작된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자세한 건 [[임진왜란]] 문서 참조. 결국 협상이 결렬되어 심유경은 처벌받을 뻔했으나 병부상서 석성의 도움으로 죄는 면했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일본으로 망명하려는 속셈으로 도망가다 경남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명나라로 압송된 뒤에 황제와 조정을 기만한 죄로 참형에 처해진다.[* 이후 [[양원]]은 1년 뒤 남원성 전투 패전의 죄를 물어 [[양호]]에게 잡혀 참수당한다. 그리고 양호도 20년 뒤 사르후 전투의 패전의 죄로 참수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