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형래/생애 (문단 편집) === 시위의 달인 === 옛날에 용가리를 개봉했을 때 거짓말을 했다가 [[씨네21]]에서 이걸 알리려 했다. 그랬더니 심형래는 영구아트 직원들을 보내 시위를 하도록 시켰다.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30231&page=1&menu=&keyword=&sdate=&edate=&reporter= Episode 8. |"남동철 기자는 자폭하라!" 1999년 7월, 영구아트무비 직원들의 항의시위]] 2005년 기사. >"남동철도 기자냐?", "남동철은 자폭하라!" 1999년 7월 어느 아침, <한겨레> 사옥 앞마당에 50여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시위대 속에 간간이 보이는 피켓의 문구에서 이들의 불만과 주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용가리> 개봉을 앞둔 영구아트무비 직원들로 세간에 알려진 <용가리> 수출액에 의문을 제기한 남동철 기자의 보도에 반발해 항의의 뜻을 전하러 온 길이었다. 상황을 짐작한 <씨네21> 기자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위대를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왔다. > ><용가리>는 1998년 칸 영화제 마켓에서 9개국 272만달러의 수출 계약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영화가 거액에 해외로 수출되는 일은 없었던 만큼 언론은 이를 앞다퉈 보도했고 이후 1년 동안 심형래 감독은 정부의 공익광고에 출연하는 등 시대의 영웅으로 추어올려졌다.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겁니다" 라는 유행어와 '신지식인' 이라는 수식어도 그때 나왔다. 신문과 TV에 연일 보도되는 <용가리> 수출 관련 내용에 실수출액이 드러나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여긴 남동철 기자는 같은 마켓에 참여했던 영화인들과 영구아트무비를 취재하면서 애초 계약이 구속력이 없는 딜 메모였고 그 결과 일부 국가와는 최종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심형래 감독의 성과를 무시하려던 게 아니라 언론과 정부의 냄비근성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사를 썼던 거죠." 항의 방문한 직원들은 반론권을 얻고 철수했지만 그들의 풀 죽은 뒷모습은 남동철 기자의 마음에 아직도 무겁게 남아있다. 2011년의 회고. [[http://www.koreafilm.or.kr/webzine/index.asp?Seq=441 |한국영상자료원]]의 [[http://admin.koreafilm.or.kr/kofa_admin/data/_Main/COVER/magazine22.pdf |영화천국 11월호]]. '''영구의 추억''' [[허문영]] - 전 <씨네21> 편집장 ・ 시네마테크부산 원장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던 심형래의 성공 신화가 허위의 도가니로 판명되는 최근의 과정을 지켜보며 해묵은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1999년 7월 5일 아침, 서울 공덕동에 있는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영구아트무비의 직원으로 구성된 50여 명의 시위대는 손팻말까지 준비해 <씨네21>을 규탄하는 요란한 구호를 외쳤다. 사태의 발단은 그 주에 실린 기사에 있었다. 이후 <씨네21> 편집장을 거쳐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 마켓실장으로 일하는 남동철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가 30억 원의 가격으로 해외에 수출되었다는 영구아트무비의 주장에 의혹을 제기했다. > >당시로선 이런 의혹 제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 사회가 1997년 말의 외환위기가 몰고 온 충격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벤처 캐피탈이 한국 경제의 구세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용가리>의 엄청난 수출 성과는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심형래는 벤처 캐피탈 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김대중 정부]]는 그를 신지식인으로 칭하며 방송 광고까지 제작했다. "못하니까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겁니다" 라는 심형래의 모토는 당대의 정언 명령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충무로에서 떠돌던 이야기는 좀 달랐다. 영구아트무비가 맺은 계약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양해각서(MOU)[* 대통령 [[박근혜]]가 뻔질나게 해외 순방하다 돌아오면서 해외 순방의 성과로 매번 요란하게 과대 허위 포장하며 들고 오는 바로 그 '''MOU'''다.] 에 불과하며 30억 원이라는 액수는 영화가 완성된 후 정식 계약 때 논의될 수 있는 수출가의 상한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수출은 성사되지 않았으며 이 수출가는 영구아트무비 쪽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한국 사회 전체가 영구아트무비에 완전히 속고 있는 셈이었다. > >당시 <씨네21> 팀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는 수석기자 김영진(현 [[명지대학교]] [[교수]])과 꽤 길게 논의했다. 우리의 결론은 <용가리> 개봉일(7월 17일) 전에 이를 기사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재 및 기사 작성은 남동철에게 떨어졌다. 남동철은 모든 분야에서 하루이틀 안에 일급의 글을 뽑아내 '기사 자판기' 로 불리는 전설의 기자였다. 그의 취재 결과 충무로의 소문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었다. 문제의 기사가 실린 <씨네21>이 발간되었고 분노한 영구아트무비 직원들이 몰려왔다. 이날의 시위대는 "남동철은 사과하라"고 구호를 외쳤고 인근 주민 한 사람은 <씨네21>로 전화를 걸어 "시끄러워 못 참겠다. 남동철이 누구냐. 빨리 나와서 사과해라"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 시위는 조선희 편집장과 남동철이 영구아트무비의 비교적 합리적인 간부 한 사람을 설득함으로써 마무리되긴 했지만 <씨네21>이 겪은 최대의 필화사건 중의 하나로 남았다. 이 기사가 심형래 감독이 자신에 대해 지닌 오해, 그리고 한국 사회가 그에 대해 지니고 있던 오해를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런 의혹글이 올라올 경우 보통 반박글이나 반박 자료를 올려 의혹을 해소하려고 하는데 심형래 측은 그런 의혹은 해소하려 하지 않고 시위로 묻어버리려고 한 셈이다. 능력과 명분이 부족한 사람들의 최후의 땡깡과 다를 게 없다. --몰락조차 추잡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