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수도 (문단 편집) == 무기 == 날길이 104cm에 동호인 20.8cm가 포함되고 손잡이 길이 31.2cm로 전체길이 135cm정도에 무게 1.5kg 정도 되는 외날 형태의 도이다.(기효신서 기준) 명나라 말기 민간에 퍼진 단도(單刀)의 규격은 더 길어졌다. 정종유의 단도법선에 실린 제식은 칼날 3척8촌, 손잡이 1척2촌으로 전체길이 5척의 도검인데 정종유는 명나라 목공척(30.7cm)을 사용하므로 칼날 116.6cm, 자루 36.84cm, 전체길이 153.5cm의 더 커진 도검이 되었다. 다만 [[쇠뇌]]를 쓰는 병사는 불편하지 않게 날길이 2척8촌(85.96cm), 손잡이 9촌(27.63cm), 전체길이 3척7촌(113.6cm)의 짧은 칼을 쓰도록 권하고 있다. 이것도 도검 중에선 상당히 큰 편. 척계광이 왜구들이 사용하는 오오타치의 무서운 기세와 위력을 감안하여 이를 모방 생산하여 화승총병에게 지급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효신서 6권 비교편 유차역에서는 각각 단거리 무기와 장거리 무기를 함께 익힐 것을 강조하면서 각 병종마다 백병전 무기와 투사무기를 규정했다. 등패수는 표창(투창), 당파수는 화전(로켓화살), 장창수는 궁시(활과 화살)를 익히고, 지방 관아에서는 궁술을 기본으로 검과 등패, 장창, [[대봉]] 등을 각자 알아서 익히면 되었다. 화승총도 백병전 무기가 있어야 하지만 총과 탄약, 개인장비가 많아 길면서도 가벼운 장도를 지급했다고 되어 있다.[* 기효신서 초판본인 18권본에서는 장도가 실려있지 않고,후기에 정리를 거친 개정본 14권본에 실린 것으로 봐서 왜구와 싸우던 시점에선 장도가 제식 채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방으로 파견된 이후로는 조총보병은 물론 조총기병에까지 지급되었으며, 이때는 쌍수장도(雙手長刀)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대 기병용 장비로도 사용되었으며, 갑옷을 입고 몸을 낮춰 말다리를 베고 일어서서 말머리를 베는 두가지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무비지에서 연병실기 비장도를 인용함.][* 효종실록 14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6월 17일(경오) 3번째기사에서는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잡혀간 사람을 만났는데, 교하(交河)의 사노(私奴) 응상(應祥)이었습니다.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그가 갑군(甲軍)으로서 지난해에 남방의 싸움터에 따라갔는데 남군이 패한 체하고 북군을 유인하여 협격해서 북군이 전멸하고 왕자(王子)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남군은 태반이 보졸(步卒)인데 철갑으로 머리와 몸을 싸고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을 굽히고 곧바로 달려가 말의 다리만을 찍으며''' 선봉에는 코끼리를 탄 자가 많이 있었다 합니다." 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쌍수도의 규격은 일본도를 충실히 모방했으나 특유의 모양새가 있어 구분이 가능하다. 진린 제독이 이순신 장군의 유족에게 전달한 [[http://pds24.egloos.com/pds/201208/17/26/b0034826_502e41ab1de9d.jpg|명조팔사품]]의 참도,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검 두자루는 기효신서에 나온 장도의 규격을 영조척으로 환산한 길이에 검 전체에서 자루의 비율이 길어진 형태[* 사실상 동호인 부분의 절반까지 자루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효신서에 나온 장도의 비율로는 자루의 길이가 검 전체에 비해 너무 짧다보니 균형이 안맞는 면이 있다. 이때문에 쌍수도 재현 시연시에 동호인을 잡고 시연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이기에 당시에도 이점이 단점으로 인식되어 동호인을 줄이고 자루를 길게 개선한 형태가 이순신 장도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명나라에서도 황제 친위대인 어림군(御林軍)의 장도는 기효신서와 같은 104cm칼날이지만 손잡이가 50cm에 달할 정도로 길어진 것이 유물로 확인된다. 심지어 시대가 지날수록 자루의 길이가 길어져 청대에는 자루가 전체 검 길이의 절반을 차지하는 형태도 나온다.]이기는 하지만 당시 명나라식 장도의 제도를 잘 보여준다. 물고기 꼬리처럼 퍼진 형태의 뒷매기(병두)는 명-청대의 중국 도검에서 계속 나타나고, 붉은색 어피, 그리고 솟은 부분이 번갈아 올라오지 않고 한방향으로만 나오는 병권매듭법 등이 그것이다. || [[파일:external/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new_%EC%B6%A9%EB%AC%B4%EA%B3%B5%20%EC%9E%A5%EB%8F%84.jpg|width=400]] || [[파일:external/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new_new_new_%EC%B6%A9%EB%A0%AC%EC%82%AC%20%EC%B0%B8%EB%8F%841.jpg|width=400]] || || 이순신 장군의 검 || 명조팔사품의 참도 || 패용법은 진린 명조팔사품 참도가 전형적인 쿠리카타(栗形:칼집 옆으로 튀어나와 칼집이 빠지지 않게 해주는 걸림턱)를 가진 일본도 칼집인 점, 후대의 명나라 민간무술서인 단도법선(單刀法選)에서도 쿠리카타를 가진 일본도 칼집을 카타나처럼 허리띠에 착용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때 척계광 군대의 화승총병들도 허리띠에 끼워 찼을 것으로 추정된다. || [[파일:녹영쌍수대도.jpg|width=800]] || || 녹영 쌍수대도(綠營 雙手帶刀) [[https://www.mandarinmansion.com/index.php/item/antique-changdao|출처]] || 청나라 시대에도 한족 군대 녹영을 통해 계속해서 실전에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섯가지의 다른 길이를 가진 도검으로 분화되었다. 1766년 출간된 황조예기도식(皇朝禮器圖式)에서는 녹영에서 사용하는 참마도(斬馬刀), 장인대도(長刃大刀), 쌍수대도(雙手帶刀), 와도(窩刀), 배도(背刀) 총 5가지의 도검이 나타나는데, 와도와 배도는 일본도를 모방한 평범한 도검이고,[* 차이점은 와도는 날폭이 32mm정도로 일본도와 같은 대신 조금 더 길고, 배도는 날폭이 넓어 베기에 특화된 대신 조금 더 짧다.] 쌍수대도가 길이와 무게로 보았을 때 기효신서 장도의 후계자이다. 참마도와 장인대도는 더 거대화된 것. 쌍수대도와 참마도, 장인대도는 일반 도검 비율이었던 장도에 비해 자루와 칼날의 길이가 5:5에 가까워진 [[나가마키]]와 같은 형태로 변했는데, 이미 기효신서 때부터 검의 조작을 위해 오른손으로 동호인 내지는 칼날을 잡는 묘사가 자주 나타났고, 결국 위험하게 칼날을 잡느니 아예 손잡이를 늘려서 쓰자는 발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오오타치가 칼날에 새끼줄을 감아 잡고 쓰다가 아예 손잡이를 늘려버린 [[나가마키]]와 똑같은 발전 테크트리를 취한 것이다. 청나라 시대에는 칼집의 양식 등이 전형적인 만주인들의 도검 형태로 바뀌었으며, 만주족의 방식대로 띠돈을 이용해 허리에 착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 [[파일:miaodao01.jpg|width=700]] || || 현대 중국에서 생산되는 묘도 || 청말 민국초에는 묘도(苗刀)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고, 기효신서의 스펙과 유사한 타입이었으나 양식은 명나라 시절의 유사 일본도 형태가 아니라 황동제 칼막이와 부품, 청나라식 칼집을 갖춘 청말 민국초 특유의 중국도 디자인을 차용했다. 조선에서는 군관 한교가 [[낙상지]](駱尙志)를 비롯한 중국 군관들에게 [[절강병법]]을 배우면서 들어왔고, [[무예제보]]에서 이를 정리했다. 이때만 해도 명나라와 똑같은 양식의 도검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무예도보통지를 출판하던 시대에는 이미 장도를 사용안한지 오래되었고, 요도(환도)로 대체해서 연습한다는 언급이 있었다.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에 이미 평범한 환도를 사용하는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광해군 2년 이전에 이미 장도가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아 환도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