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쑨촨팡 (문단 편집) === [[국민당의 1차 북벌]] === [[국민혁명군]]이 초기에 하남성과 양호 지역을 지배하는 [[우페이푸]] 타격에 우선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우페이푸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관망하는 한편 국민당과의 협상을 꾀했으나 [[장제스]]가 광저우 국민정부에 복종하고 국민당에 입당하는 조건을 제시하자 이를 거부하고 보경안민을 외치며 산동성의 [[장쭝창]]과 의형제를 맺어 북방을 안전히 하는 한편, 병력을 배치하여 국민혁명군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었다. 1926년 9월 국민혁명군이 강서성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국민혁명군과 쑨촨팡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민혁명군은 초기에 난창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으나 쑨촨팡의 반격으로 곧 격퇴되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직접 독전에 나서고 국민혁명군이 포위기동에 나서자 결국 쑨촨팡은 강서성을 잃고 난징으로 퇴각했다. 10월 11일 난창이 다시 포위되고 11월 4일 구강이 함락되자 쑨촨팡은 배를 타고 상하이로 도주하여 11월 8일 난창이 다시 국민혁명군의 손에 들어왔다. 쑨촨팡은 복건의 주음인에게 명령하여 광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지만 주음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푸저우에서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쑨촨팡이 재차 공격을 지시하자 주음인은 할 수 없이 광동을 공격했으나 [[허잉친]]이 남방에서 진격하여 도리어 12월에 복주가 점령되었고 1927년 1월에 절강에 이르게 되었다. 11월에 이르러서는 장쭝창 등 봉천군벌의 실력자들이 쑨촨팡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장쭤린은 쑨촨팡을 안국군 부사령관 겸 오성연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쑨촨팡과 동맹을 체결하고 공동으로 국민당에 맞서기로 했다. 쑨촨팡은 [[돤치루이]], [[우페이푸]]를 연계하는 독자적인 3각동맹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직접 톈진으로 가서 장쭤린과 회담, 국민당과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2월에 항저우가 함락되었으며 3월에 이르러 [[리쭝런]]이 안휘성을 점령했고 [[쉐웨]]와 [[바이충시]]의 공격 및 [[저우언라이]]가 주도한 폭동과 총파업으로 인해 강소성 역시 국민당에게 넘어갔고 쑨촨팡은 장강을 넘어 북으로 도주했다. 국민당은 이때 국공갈등이 심해져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로 분열되었지만 양 국민정부 모두 일단 서로에 대한 공격은 하지 않고 각각 북벌에 나섰다. 난징 국민정부는 쉬저우을 함락, 산동성으로 북상했고 쑨촨팡은 병력을 보전하기 위해 계속 퇴각해야 했다. 베이징으로 간 쑨촨팡은 장쭝창 등과 함께 장쭤린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여 안국군 정부를 수립한 후 7월에 장제스에 대한 역습을 감행했다. 마침 [[탕성즈]], [[장파쿠이]] 등 우한국민정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해야 했던 장제스는 쑨촨팡의 역습에 크게 당하여 쉬저우를 잃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쑨촨팡의 공세는 결국 8월 리쭝런, 바이충시, 허잉친의 공세에 격퇴되었으나 8월 13일 장제스는 우한과 난징의 통합을 위해 하야했고 [[영한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일본은 쑨촨팡과 장쭝창을 원조하기 위해 [[관동군]]을 산동반도에 보내는 [[1차 산동파병]]을 단행하여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저지하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