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레오빈두스 (문단 편집) == 생애 == 부친은 461년 [[집정관]]을 역임한 다갈라이포스이며, 어머니는 447년 집정관을 역임한 아르다부르의 딸 고디스테아이다. 고디스테아는 [[아스파르]]의 손녀이기도 하다. 478년 직후, 아레오빈두스는 서로마 황제 [[올리브리우스]]와 [[플라키디아(올리브리우스의 아내)|플라키디아]]의 딸안 아니키아 율리아나와 결혼해 아들 올리브리우스를 낳았다. 502년 [[사산 왕조]]의 왕중왕 [[카바드 1세]]가 동방을 침략하자, 그는 총독 [[히파티우스(500년 집정관)|히파티우스]], 파트리키우스와 함께 오리엔트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직책을 받고 동방으로 파견되었다. 503년 5월, 아레오빈두스는 1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라에 주둔하였고, 싱가라에서 밀려오든 페르시아군을 격타하여 니시비스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적의 원군이 오자 에데사로 퇴각했다. 9월 카바드 1세가 에데사를 포위했지만 끝까지 버텼고, 겨울에 접어들어 로마 지원군이 도착하자 카바드 1세는 철군했다. 504년 여름, 아레오빈두스는 사산 왕조의 변경 도시인 아르자네네에 대한 대대적인 습격을 감행해 그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아미다로 돌아갔다. 결국 카바드 1세는 휴전에 동의하여 전쟁이 종식되었다. 512년, 아레오빈두스는 군직에서 은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살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칼케돈 주교를 파면하여 단성론자를 주교로 임명하자, 녹색당이 격노하여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아레오빈두스의 집에 행진하여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아레오빈두스는 찬탈에 가담하기 싫어 잠적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당시엔 고령이었기 때문에 곧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6세기 집정관]][[분류:동로마 집정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