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아자동차 (문단 편집) === [[이란-이라크 전쟁]] 특수 === 이란-이라크 전쟁 국면을 타고 아시아자동차는 사세를 키우게 된다. 1981년경부터 [[효성그룹|효성물산]]이 [[이란]]으로부터 수주를 받았는데, 효성 측에서 가격은 걱정 말라며, 1,000만원 하는 1/4톤 군용 지프를 수출용으로 개조한 물건을 1,200만원씩 받고 넘기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란으로 수출된 아시아 군용 지프는 현지에서 '''꼬레아 NO.1'''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큰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사는 1982년 수출 1천만불탑, 1983년 2천만불탑을 각각 받았다. 현지에 차량을 수출한 브랜드 중에는 [[영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 메이커도 있었는데, 유독 아시아 차량이 인기를 끈 요인은 다음의 2가지였다고 한다. * 구조의 단순함 - 당시 대부분의 국산 차량은 본네트를 열어보면 엔진부와 에어컨 부분 외엔, 눈에 띄는 부품없이 텅 비어있을 만큼 구조가 단순해[* 당시 고급 차종이었던 [[현대 쏘나타|쏘나타]] 초기 모델마저도 내부는 [[현대 포니|포니]]와 다를 바 없이 단순했다고 한다. 반면, 벤츠는 보닛(본네트)을 열면 복잡하게 부품이 꽉 차있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정비와 운용이 용이했다. [[엔진오일]] 등 주입하는 부분도 한국인 관계자가 빨간 눈금 부분까지만 넣으라고 당부한 내용만 따르면 무리없이 쓸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단, [[적십자]] 표시는 이슬람권인 현지에서 [[십자군|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부산 세관에서 [[적신월]] 마크로 도색을 다시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 우직함 - 전쟁 중 본네트에 환자를 싣고 달려도 영국, 프랑스 브랜드와 다르게 중량 초과로 차가 움직이지 않게 되는 일 없이 어떻게든 차가 굴러가는 튼튼함과 우직함이 있었다고 한다. 1980년 2차 오일 쇼크 이후 1981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승용차 생산은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전신)가, 중 · 소형 트럭 생산은 기아자동차가 [[독점]]하게 되었으며, 이는 1986년까지 지속되었다. 1986년에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 해제 이후에 기아자동차도 승용차를 개발하지만 이는 기아자동차의 브랜드로 판매되었고, 아시아자동차는 군용 차량과 대형 버스, 트럭을 계속 생산해 자체 브랜드로 판매했으며 1984년 [[소하리]] [[공장]]에 있던 [[기아 복사]] 생산라인도 이관받으면서 처음으로 기아 차종도 [[위탁생산]]했다. 같은 해엔 일본 [[히노자동차]]와 대형트럭 기술제휴를 맺어 [[아시아 AM트럭|AM트럭]]을 생산한 후, 1986년에 기술연구소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광주광역시|광주]]와 [[부산직할시]]에 정비사무소를 열었다. 1988년에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한 후 1989년 [[스웨덴]] [[스카니아]]와 판매대리점 계약을 맺었으며, 1992년 [[스위스]]에서 해외전환[[사채]]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엔 하남 특장공장을 세워 특장차 생산라인을 그리로 이전했다. 1994년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서울정비사업소 안에 기술연구소를 새로 만들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tTmlu9oTxY, width=540)]}}}|| || {{{#fff '''1996년 아시아자동차 [[브라질|{{{#fff 브라질}}}]] 바히아 공장 건설 체결 당시 모습'''}}}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