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티누스 (문단 편집) ===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대한 비판 === 서방에서 매우 존경 받는 교부이고 서방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거의 다 이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업적을 쌓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가톨릭에서든 개신교에서든 '아우구스티누스 반대하면 이단'이라는 식의 단순화는 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는 그의 조직으로써의 교회를 강조한 교회관, 마리아를 높이 평가하였던 마리아론 등을 반대하며,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구원론 관련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비판 의견이 다소 있다. >사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이런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많은 영혼이 구원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정 어린 염려의 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종말론은 패배주의{{{-2 Laxismus}}}만을 겨냥한 게 아니라, 중죄를 지었으면서도 영원한 벌은 없다며 죄책감을 가질 줄 모르는 소위 외람된 희망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이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렇게도 위대한 인물이, 그렇게도 많은 신앙인이 의지하는 교회의 한 인물이 복음서가 정해놓은 경계를 넘나들면서까지 종말론을 분칠했다는 것이리라.'''^^55^^ >---- >[주석] 55. 여기 결론을 대신해서 [[프랑스]] 신학계의 두 거두의 말을 인용한다. >||"아우구스티노는 [[바오로]]의 변증법적 대조명제를 역사적 대조명제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은총신학이 원죄신학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톨릭신학은 이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마침내 찾아냈다." [Henri Rondet, in ''L'Esprit Saint et l'Église''(Paris: Fayard, 1969), pp.173-174]|| > >||"아우구스티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사랑 위에 이교도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올려놓았다. 사실 이교도들은 은총을 인간 본성에 내재된 욕구로 생각했고, 죄로 기울어지는 욕망과는 정반대의 실재로 이해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심지어 죄인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가 하느님의 자비를 끝까지 거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자비에 굴복하지 않게되면, 은총은 필연적으로 죄인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원예정설은 여기서 제한을 받는 꼴이고, 하느님께서는 만인의 구원을 원하신다고 전하는 바오로의 생각(1티모 2,4)과도 대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그 누구도 지옥에 가기를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위대하고 거룩한 아우구스티노의 결함이라면 구원 역사의 형평성을 깨트렸다는 것이고, 인간의 구원에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아담에 집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심판 개념이란 오롯이 원죄로 정향되어 있어서 장차 오실 구원자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부께서 모든 심판 권한을 넘겨주실 바로 그 구원자 말이다. 도대체 아우구스티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누구에게 들어서 안 것일까?''' 하느님은 이에 관해서 어떤 것도 계시하지 않으셨고, 더구나 살생부가 있다는 말은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오로지, 그러나 분명하고 명확하게, 아니 오히려 격렬하고 끊임없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설교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친구이지만 그를 배신할 수도 있는 소지가 다분한 우리에게 이를 경계하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셨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아담 안에서 모든 세상을 단죄해 버린 것이다. 그는 지옥에는 아무도 없다고 장담한 오리게네스보다 오히려 지옥에 대해서 덜 알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아우구스티노가 지옥에 대해서 단언한 그 모든 지식이 어디에서 왔을까?'''" [André Manaranche, Le ''monothéisme chrétien''(Paris: Cerf, 1985). p.238]||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2 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구원 이야기》{{{-2 Was dürfen wir hoffen?}}}, 김관희 신부 옮김, 바오로딸, 2018, 97-99쪽 >'''《신국론》 XXI 12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은총으로 구원받을 이의 수보다 멸망할 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 말은 무책임한 하나의 신학적 타락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실행적인{{{-2 performativ}}} 본문을 정보 제공적인{{{-2 informativ}}} 본문으로 바꾼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신부,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2 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김혁태 신부 옮김, 생활성서사, 2022, 396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받는 존경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사실 위에서 소개한 [[박승찬]] 교수의 평이나 [[베네딕토 16세]]의 평에서 보듯, 아우구스티누스가 받는 존경의 원인은 "아우구스티누스는 틀린 명제를 말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극적인 삶과 아름다운 문장 등 종합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