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티누스 (문단 편집) === 사제로서의 활동 === 387년, 그리스도인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 및 친구와 더불어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도중에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고, 388년에 아프리카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수도 공동체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머지 않아 아들도 죽고 말았다. 후에 수도회원들은 점점 늘어났고 공동체는 단순한 수도생활을 넘어 일종의 성서 연구소로 탈바꿈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꾸려놓은 수도회는 한참 후인 13세기에 그가 정립한 회칙을 바탕으로 탁발[[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로 정식 발족한다. 391년, [[사제]]가 되지 않고 수도생활을 더 하고 싶었던 36세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를 더 모을 생각으로 히포로 출장을 가 [[미사]]에 참례했다. 아우구스티노의 명석함과 타의 모범이 되는 보속의 생활은 이미 그곳까지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가 강론 중 히포에 새로운 사제가 필요하다고 한 순간, 사람들이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졸지에 발레리오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게 아닌데 싶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울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엉뚱하게 그가 [[주교]]가 되지 못해 서운한가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395년에는 보좌주교가, 발레리오 주교가 세상을 떠난 396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수사학 지식까지 총동원하여 히포의 백성들을 위해 사목 활동에 집중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직접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으며, [[삼위일체]], 은총론 등의 영성신학을 연구하고, 방대한 양의 각종 저술활동을 통해 교회를 공격하는 [[영지주의]]([[그노시스]]), [[도나투스파]][* 로마의 기독교 박해 때, 신앙적 배교를 택했던 이들이 다시 주교로 임명되자 이에 반발했던 부류이다. 시작은 도나투스 주교. 이들은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로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배교한 또는 타락한 성직자들은 다시 성직자로 일할 모든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교회는 성도와 죄인들의 혼합공동체로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립하였으며, 공개토론까지 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빨에 지고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흔히 분리주의로 분류되며, 극단적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정죄된 후 아우구스티누스를 암살시도까지 했었다. 은총론, [[칠성사|성사]]의 사효성[* [[7성사|성사]]의 효력이 적법한 경문과 표지([[세례성사|물로 씻어냄]], [[안수]], [[병자성사|기름 바름]] 등) 등 객관적 지표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 이후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으로 인정받았다.]과 인효성[* 성사의 효력이 거행하는 이의 도덕성, 죄의 유무, 신앙의 강도 등 주관적 자질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 현대 교회에서는 성사가 아닌 기도, 축복 등 준성사에만 해당한다고 본다.], 교회론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매우 중요한 논쟁이다. 좋은 예로, [[이근안]]이나,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목사로 칭할 자격이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 거룩함을 강조하는 도나투스파에게 '너네도 그렇게 살지 못하잖아'라고 반박했다], [[펠라기우스]][* [[영국]] 출신의 성직자로, 아담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여 인간이 죄짓지 않고 살 수 있음을 주장했다.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절대타락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는 신학적 원수였다. 논쟁의 자세한 사항은 [[펠라기우스]] 문서 참조][* 인간에게 강력한 도덕적 의무를 주장한 점에서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주의는 유사하다. 펠라기우스 논쟁도 초대교회 주요 논쟁에서 꼭 거론되는 논쟁이다], [[아리우스파]] 등을 향해 쉬지 않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 중에는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마니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마니교 전력은 주교가 된 이후로도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수많은 논쟁에 뛰어들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마니교 전력은 자신의 적들에게 인신공격까지 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고백록>의 집필 배경 중 하나도 지인들이 그의 생애가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받은 417년 이후에는 절충적 펠라기우스주의자인 율리안에게서 자신의 논리가 마니교적이라고 공격받았다.[* [[바오로]]가 초기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과거 때문에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사도직의 근거를 변증해야 했던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마니교에 가담했던 과거 때문에 주교가 된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사상이 마니교와 관련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고백록>의 집필 계기 중 하나도 이러한 의혹을 씻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나투스파들을 로마제국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무력진압한 일이 있었다. 물론, 이는 너무나 강한 종교적 광기로 가득찬 광렬 도나투스파들이 약탈과 방화 등 테러나 다름없는 행위를 일삼았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거기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오히려 보편교회쪽 신자보다 도나투스파 신자가 더 많았는데, 그중에는 기득권 세력과 결탁했던 상류층 상당수 있어서 매우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폴존슨,<기독교회 역사>)] 그는 폭력을 써서라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종교재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때 그 생각의 근거가 된 루카 복음의 '강권하여 데려오라.'는 구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 이후부터 그 구절을 강제로라도 교회 데려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오해가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칙적으로 '폭력적으로라도 개종시켜라.'를 주장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본래 도나투스파를 대하는데 있어서 많은 동료 신학자들보다 훨씬 더 온건한 편이었다. 처음에 그의 입장은 '박해는 악인이 하는 것이다.'였고, 도나투스파도 어디까지나 말로 설득해서 생각을 바꾸도록 해야 하며 국가의 공권력으로 탄압을 하는 일만은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동료 사제들을 달랬다. 근 10년에 걸친 온갖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도나투스 파와의 극한적인 대립과 폭력 상황이 이어지자 마지못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지, 이를 적극 권장하고 '폭력을 이용한 강제 개종'을 일반적인 정책으로 역설했던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극렬 도나투스 파에 대한 최후의 필요악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John Christian Laursen, Cary J. Nederman (eds.) Beyond the Persecuting Society: Religious Toleration Before the Enlightenmen, Philadelphia, 1998, p. 17.) 399년쯤에는 그의 3대 대작[* <신국론>과 <고백록>,<삼위일체론>. 이른바 ‘하느님을 만나는 인간의 길’] 중 하나인 삼위일체론 저술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 중에서도 저술 동기가 꽤 특이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부분 이단을 논박하거나 논쟁적 상황, 또는 지인들의 요청에 의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유독 삼위일체만은 학문적 관심에서 저술하였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삼위일체론만을 저술해서 426년쯤에 최종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근데 이것도 주변 지인들이 중간에 원고를 몰래 가져가서 해적판으로 출시한 사건으로 그나마 앞당겨진 것이다. ~~안 그랬으면 유작 될 뻔~~[* 삼위일체론 저술과 관련해서 한 가지 재미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아우구스티누스가 해변을 걷고 있다가 모래 위에 구멍을 내서 거기에 바닷물을 넣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뭐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소년이 "바다의 깊이를 재고 있다."라고 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피식 웃으며 "너는 결코 바다를 그 구멍 속에 다 넣을 수 없단다. 바다가 너무도 넓고 크기 때문이지." 하고 비웃었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면서 "삼위일체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랍니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는 것이다.] 죽기 3년 전에는 자신의 저서들을 다시 검토하는 <재론고Retractationes>를 지었다. 이때 100권이 넘는 저술 목록을 보고 놀랐다고. 특이하게도 재검토 작업을 그 책을 짓기 시작한 순서대로 진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사고와 행적을 추적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재론고>이다. 은근히 워커홀릭 기질이 있다. 주교가 된 이후로 그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우선 그는 히포의 주교이기 때문에 매주 설교를 해야했다.[* 당시의 설교는 지금처럼 원고를 미리 작성해서 읽는 것이 아닌 그 자리에서 거의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어서, 설교자의 언변이 그만큼 더 중요했다. 게다가 청중들은 설교가 맘에 안 들면 야유를 하거나 자리를 나가기도 했다.] 당시 주교는 교회일뿐만 아니라 담당 교구의 민사 사건도 해결하는 역할도 맡았기에 자잘한 사건들의 해결도 전담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회의란 회의는 빠지지 않고 거의 다 참석했다.[* 그는 이동할 때 배는 거의 이용하지 않고 거의 말을 타고 육로로 주로 이동하였다] 그 와중에도 이단들에 대한 반박 저술이나 기타 저술도 끊임없이 지었으며, 말년에는 <재론고>를 쓰느라 자신의 책들을 전부 꼼꼼히 비평하는 작업까지 더해졌다. 427년에는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로마 제국]]을 약탈하며 북아프리카를 ~~[[반달]]~~쳐들어왔고, 그들을 피해 타 지역에서 사람들이 히포로 몰려들어왔을 때 아우구스티노는 거처를 제공하는 등 그들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430년에는 히포까지 포위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공들여 이룩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병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8일]],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7장을 읊으며 7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당시 성이 포위되어 먹을 것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는데, 이때 아우구스티누스도 아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해는 반달족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사르데냐]] 섬에 묻혔다가 훗날 이탈리아 본토인 파비아와 밀라노로 옮겨져 유해 일부가 성유물로 보존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